"아, 안녕하세요. 누나."
켈티스타운에서 만난 장난꾸러기 이브이와 소년 벤은 여행의 시작이었으나, 가장 큰 줄기를 관통하는 이야기와 연관된 이였다. 아직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에게 연달아 닥쳐온 시련은 단순한 굴곡이라기엔 너무나 큰 일이었지만, 아이도 사람인지라 어떤 식으로든 버티고 있었다. 어떤식으로든.
"파르페 하나 주시고요...뭐 먹을래?"
"으음- 전 아무거나 괜찮아요."
"그래? 그럼 여기 복분 탕후루 하나..."
"...."
"농담이고, 여기 와플이요. 초코아이스크림 얹어서."
아이를 돌보는 것, 그것도 마음에 상흔이 남은 아이를 지켜보며 그 상처를 낫도록 밀어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비즈니스적으로 선을 긋고 적당히맞닿은 사람끼리도 마음을 얻기 힘들텐데, 어떻게든 견디려는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은 더 힘든 법이었다. 그건 몇몇 어른들이 벤의 사정을 안타까워 하는 것과 별개로 '좋은 보호자'가 될 수 없다 말한 것과 같은 이치였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어본다고, 경험한 것이 없으니 뭘 어떻게 접근해야 할 지 몰랐다. 스스로의 어린시절을 돌이켜 보면 [ 애? 그냥 놔두면 알아서 크던데. 아, 물론 편한만큼 관계가 멀어지거나 통제에서 벗어나는 건 알아서 하시고~ ] 로 요약되는지라, 암만 경우가 없어도 이게 제대로 된 양육자가 아니라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진지하게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득한 어딘가의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 통통배 하나에 올라타 약어리와 사투를 벌이길 저주하는 마음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로제는 벤의 이브이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폴짝 내려와 이브이에게 와락 안겼다. 이브이 역시 장난기가 상당한지라, 녀석들은 소파위에서 이리저리 우당탕탕 뒹굴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로제, 자꾸 그러면 디저트 안 줄줄 알아."
- .....!!!
입을 직사각형 모양으로 떡 벌리며 어떻게 그럴수있냐 항의하는 녀석을 뒤로 한 채, 벤을 이곳에 부른 용건을 보여주기로 했다. 책 두권이 담긴 쇼핑백을 앞에 놓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이게 무엇이냐 물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 까, 어디까지 말하는게 나을까- 라고 머리를 굴리는 것도 잠시, 벤의 얼굴을 보자 다 의미없다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사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신이 감히 가릴 자격이 있는걸까.
"음... 저번에 보여준 책, 기억해? 네가 초판본이라고 했던 그 동화책."
"네."
"이 책 말이지, 아마 너희 어머니와 이모가 가지고 있던 책일거야."
"......?"
가장 사랑해서 가장 선명한 상흔을 남긴 두사람을 여기서 꺼내는 것이 옳은가, 싶었지만 상처입은 것을 조심스럽게 다루는 재주는 없었다. 그리고 의젓한 아이가 충분히 느끼고 있는 타인의 위로와 선의라는 이름의 짐을 얹어주고 싶진 않았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염려가 쓸데없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아무리 숱한 선의가 피곤하게 느껴진다지만, 솔직히 그냥 내버려두고 모르는 척 하는 것보단 적당한 거리, 적당한 온기로 겹겹이 감싸주는 것이 백 배는 나았다... 그러니 이렇게 애 다룰 줄 모르는 인간도 배려라는 핑계로 신중하게 접근할 수 있을테고.
"나중에 알았는데, 이 책을 발견한 곳이 너희 어머니와 이모가 어릴때 살고 있던 곳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네게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어."
잠든 탑의 공주에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던 두 사람, 그리고 그 아이들이 보았던 수많은 이야기들 중 하나였을 책이었다. 둘의 흔적이 묻은 이 동화책이 어떤 의미로 와닿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책이 돌아가는 곳은 두 사람이 사랑한 남겨진 가족이어야 했다.
공백포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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