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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블룸_리크

무언가의 초고에서 이어지는 조각글2

by 배추쿵야 2024. 10. 9.

여자는 딱히 주술이니 영적인 무언가를 믿는 부류는 아니었다. 7할 정도는 사기꾼, 3할 정도는 정체 모를 것에 대한 경계를 갑옷처럼 두른 눈으로 이쪽을 보는 것이, 얼마나 믿을까 싶었지만 사람이 잠을 잘 때 느슨해진 경계를 타고 기억을 뒤섞어 버리거나 잘라내는 주술이 있다는 설명에는 수긍하는 눈치였다. 

 

굳이 증거를 들어 설명하거나 언쟁을 벌일 수고가 사라져 편했지만 의심하면서도 순순히 무언가를 믿는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꽤 희귀한 케이스라 오히려 더 궁금해졌다. 게다가 '그것'의 영향에 노출되고도 여전히 구멍이 좀 뚫린 것 빼곤 견고한 정신을 유지하는 일반인이라니. 이건 운이 좋은 걸까, 아니면 뭔가 있는 걸까. 

 

"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물어보세요."

"미안합니다. 질문을 생각하던 중이라서... 사실 이 방에서 묵었던 피해자들 중에서 대화가 가능한 게 지금 손님밖에 없거든요. 그럼.... 기억에 공백이 생겼다는 걸 아셨다고 했는데, 혹시 어디가 비어있는지도 알고 있을까요?"

"음..."

 

보통 기억이라는 것은 길게 이어지는 필름같은 것으로 묘사가 된다. 편집을 위해 필름을 자르고 이을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무언가가 빠지거나 조각이 뒤섞일 수 있으며, 그것을 풀어서 재생하는 순간 장면을 확인하며 위화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 같이 지내던 사람이었는데, 분명 그 사람과 뭔가 했다는 건 기억나요.

근데, 그 사람의 모습만 잘려나갔어요."

 

여자의 기억은 뒤섞인 필름이 아니라 구멍난구멍 난 필름에 가까웠다. 화면이 있으면 배경, 소품, 인물의 배치가 있는데, 특정인의 모습이 구멍 난 것처럼 뻥 뚫려있다고 했다. 누군가와 무언가를 한 기억은 있지만 정작 등장인물이 사라져 허공에 대고 손발을 휘젓는 꼴이었다.

 

"... 그거 참, 신기하네요."

 

신기해라.

기억의 오염이라고 표현하는 건 옳지 않았다. 이 정도로 깔끔하고 공백이 느껴지나 기억 전체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없애는 것은 '삭제'라고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잘라내는 것은 '독'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것은... 아, 여자가 표정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기억이 날아간 사람 앞에서 너무 속내를 드러내버렸나 보다. 미안하다 얘기하려고 입을 열렸는데, 먼저 치고 들어오듯이 여자가 말했다.

 

"신기해하든 말든 상관없지만,

반드시 찾아서 복구해야 할 거예요."

 

크기에 비해 제법 거친 손이 어깨를 조금 힘주어 움켜잡았다. 명백히 압박을 주겠다는 의도가 느껴졌다.

 

"아주 중요한 기억이니까."

 

어둑한 심록의 색 너머 바늘 끝을 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잘 벼려진 칼처럼 서늘하거나 살기가 있다고 하기엔 가늘지만, 눈 하나쯤 찌르기에는 문제없다는 집요함이 느껴졌다. 받은 것이 있고, 받을 것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애초부터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만에 하나 모르는 척 놔버리는 순간 이 시선이 무엇이 되어 우리를 찌를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이든 되어서 찔러버리겠지. 나는 상관없겠지만 백아가 다치는 건 보기 싫으니, 좋게좋게 가도록 할까. 

 

 

 

"걱정 마세요."

 

살벌한 시선을 받는 게 오랜만이라 그런 것일까. 

어쩐지 가슴께가 따끔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