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딱히 주술이니 영적인 무언가를 믿는 부류는 아니었다. 7할 정도는 사기꾼, 3할 정도는 정체 모를 것에 대한 경계를 갑옷처럼 두른 눈으로 이쪽을 보는 것이, 얼마나 믿을까 싶었지만 사람이 잠을 잘 때 느슨해진 경계를 타고 기억을 뒤섞어 버리거나 잘라내는 주술이 있다는 설명에는 수긍하는 눈치였다.
굳이 증거를 들어 설명하거나 언쟁을 벌일 수고가 사라져 편했지만 의심하면서도 순순히 무언가를 믿는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꽤 희귀한 케이스라 오히려 더 궁금해졌다. 게다가 '그것'의 영향에 노출되고도 여전히 구멍이 좀 뚫린 것 빼곤 견고한 정신을 유지하는 일반인이라니. 이건 운이 좋은 걸까, 아니면 뭔가 있는 걸까.
"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물어보세요."
"미안합니다. 질문을 생각하던 중이라서... 사실 이 방에서 묵었던 피해자들 중에서 대화가 가능한 게 지금 손님밖에 없거든요. 그럼.... 기억에 공백이 생겼다는 걸 아셨다고 했는데, 혹시 어디가 비어있는지도 알고 있을까요?"
"음..."
보통 기억이라는 것은 길게 이어지는 필름같은 것으로 묘사가 된다. 편집을 위해 필름을 자르고 이을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무언가가 빠지거나 조각이 뒤섞일 수 있으며, 그것을 풀어서 재생하는 순간 장면을 확인하며 위화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 같이 지내던 사람이었는데, 분명 그 사람과 뭔가 했다는 건 기억나요.
근데, 그 사람의 모습만 잘려나갔어요."
여자의 기억은 뒤섞인 필름이 아니라 구멍난구멍 난 필름에 가까웠다. 화면이 있으면 배경, 소품, 인물의 배치가 있는데, 특정인의 모습이 구멍 난 것처럼 뻥 뚫려있다고 했다. 누군가와 무언가를 한 기억은 있지만 정작 등장인물이 사라져 허공에 대고 손발을 휘젓는 꼴이었다.
"... 그거 참, 신기하네요."
신기해라.
기억의 오염이라고 표현하는 건 옳지 않았다. 이 정도로 깔끔하고 공백이 느껴지나 기억 전체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없애는 것은 '삭제'라고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잘라내는 것은 '독'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것은... 아, 여자가 표정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기억이 날아간 사람 앞에서 너무 속내를 드러내버렸나 보다. 미안하다 얘기하려고 입을 열렸는데, 먼저 치고 들어오듯이 여자가 말했다.
"신기해하든 말든 상관없지만,
반드시 찾아서 복구해야 할 거예요."
크기에 비해 제법 거친 손이 어깨를 조금 힘주어 움켜잡았다. 명백히 압박을 주겠다는 의도가 느껴졌다.
"아주 중요한 기억이니까."
어둑한 심록의 색 너머 바늘 끝을 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잘 벼려진 칼처럼 서늘하거나 살기가 있다고 하기엔 가늘지만, 눈 하나쯤 찌르기에는 문제없다는 집요함이 느껴졌다. 받은 것이 있고, 받을 것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애초부터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만에 하나 모르는 척 놔버리는 순간 이 시선이 무엇이 되어 우리를 찌를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이든 되어서 찔러버리겠지. 나는 상관없겠지만 백아가 다치는 건 보기 싫으니, 좋게좋게 가도록 할까.
"걱정 마세요."
살벌한 시선을 받는 게 오랜만이라 그런 것일까.
어쩐지 가슴께가 따끔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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