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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블룸_리크

무언가의 초고에서 이어지는 글 10

by 배추쿵야 2024. 12. 12.

 

마음 속에 깊게 박힌 존재감치곤 그들의 기억은 그리 따뜻하고 눈물 날만큼 그리운 것도 아니었다.

 

이제와서 말하지만 카멜리아는 꽃을 사랑하는 만큼 인간을 싫어하여 어울리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 노인이었고, 자신은 그녀가 키우는 비비용을 보러 아득바득 비집고 들어오던 고집세고 무례한 동네 꼬마에 불과했다. 다만 못마땅하다는 듯이 뭐라 하면서도 과자 하나, 잡초 뽑기를 시키면서 주스 하나를 챙겨주던 것이 무관심보다는 훨씬 좋아서 부지런히 들락날락 했을 뿐이었다. 

 

'벌'을 핑계로 그 노인은 내심 자신이 알던 것을 꼬마에게 하나씩 쥐여주었다. 지리한 피아노 연습이라거나, 쓸데없는 티타임 예절이나, 전혀 마음에 와닿지 않는 비싼 그림 이야기라든지. 그 중에서 가장 가득 안겨준 것은 잡일로 부려 먹으며 강제로 주입한 꽃 이름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저렇게 지내다보니 결국 머릿속에 남는 건 꽃과 정원뿐인 어른이 되어버렸다.

 

 

"어떤 사람이었냐면....."

 

어떤 사람이었더라? 이야기를 재밌게 하는 재주는 없으니 대충 느끼는대로 얘기를 하려 했지만 막상 그녀에 대해 그려내려니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나마 어렴풋이 기억나던 모습조차 사고에 휘말려 통째로 잘려나가 구멍이 뻥 뚫려버렸으니, 겉모습도 몰랐다.  그저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그녀에게 보내던 편지에 묘사하던 한 줄의 글, 그리고 그 남자가 엿보았던 정원에서의 한때뿐.

 

"성격이 썩 좋지 않은 정원사였어요.

사람을 정말 싫어했거든요. 그래서 딱히 친절하게 굴지 않았어요.

이것저것 아는 척도 좋아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과시하는 걸 즐겼고.... 아, 그래도 아름다운 것은 좋아했네요."

 

하나 하나 기억하는 것을 늘어놓자, 조금은 그 텅 빈 형상에 무언가가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팔자에도 없는 기억력 훈련 내지는 심리 상담을 받는 기분이었다. 상대는 훌륭한 전문가가 아니라 남의 마음 속을 쑤시려는 부류라는게 조금 흠이랄까. 

 

다만 마른 사랑동이에서 물을 짜내봤자 방울방울 나오듯이, 복잡한 생각과 사감이 다분한 견해를 쳐낸 결과물은 얼마 이어지지 못했다. 그렇게 10년이 넘도록 계속 생각하며 지지대로 삼은 기억인데도 정작 카멜리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는 걸 확인하니 조금은 허무했다. 

 

 

"흠? 카멜리아씨. 꽤 힘들어 보이네요. 생각보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모양이죠?"

"...그러게요. 이럴거면 그게 없어졌다고 왜 화냈는지도 모르겠어요.

...아, 물론 그 기억은 찾아야죠. 짜낼게 없다고 당신 실수가 없던 게 되는 건 아니에요."

"빡빡하시긴."

 

짧게 혀를 차면서 이내 빙그레 웃는 꼬라지를 보니까, 저거 아무래도 주기적으로 고삐를 잡아 채 줘야 사고 수습을 할 타입이었다. 

 

"뭐, 감정이 깊다고 상대를 속속들이 알라는 보장은 없잖아요? 사람은 생각보다 자극에 약해서, 강렬한 기억 몇 개에 순식간에 지배되기도 한답니다? 어쩌면 카멜리아씨의 그 '할머니' 도 그런 분이실수도 있죠."

"알고 있지만 썩 기분이 좋진 않아요. 마치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동경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잖아요."

"흐음- 어리석은 꼬렛떼 같은 인간은 되고 싶지 않단 말일까요? 아- 하긴 그럴때도 있죠... 무의식에 남을 정도로 반추하던 기억이라면, 내 시간이 고작 조각배도 못한 파편에 의존한 꼴일테니까. 

아니! 어쩌면 그럴수도 있겠죠."

 

고개를 들자 남자의 얼굴이 훅, 하고 가까워졌다. 나른하게 웃고 있으나 눈은 궤뚫을 듯 정면에서 지그시 이쪽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내가 곱씹던 그 감정이 과연 진정한가- 그런 생각이 든다던가?"

 

시발.

저격은 이쪽의 전공이건만, 이렇게 시선에 궤뚫리고 그 속에서 마음을 끄집어 내듯이 읽는 것은 재수없었다. 그게 아주 틀린 말도 아닌지라 더 짜증났다. 헤아린다든가, 사려깊다든가. 하는 것과는 억만년 거리가 멀었던지라 아주 보기좋게 기습을 당한 셈이었다.

 

"알게 뭐에요, 저한테 그 분에 대한 순정이라도 바란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알게 뭔가.

 

 

마음을 읽고 골몰하는데 서투르다는 것은 간파당해도 딱히 당황할 이유가 없다는 것과 같았다. 침잠하지 않으니 숨기고 싶은 것도 없었다. 다만 아주 여린 부분이 드러나서 조금 부끄러울 뿐. 그리고 리크는 그런 섬세한 감정을 여러의미로 밀어 젖힌 뒤 구석에 박아두는 걸 아주, 아주 잘하는 인간이었다. 멈춰서서 후회하고 슬퍼하고 부끄러워 해봤자 그 누가 알아주는가? 중요한 것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궤뚫어봤자 당신이 나한테서 뭘 얻을 수 있는데? 괘씸하기도 하고, 기습을 당한게 조금 분하기도 하여 절로 삐딱한 웃음이 떠올랐다. 

 

"감정에 매몰되어 봤자 돈이 나와요, 빵이 나와요? 그럴 시간에 닥친 일부터 해결해야지.

꽤나 낭만적이시네, 유도화씨. 순정 운운하는 건 본인 얘기에요?"

 

"그럼요. 이래뵈도 저, 수줍음도 많고 생각도 많아서. 어릴 때는 제법 이런저런 감정을 곱씹기도 했답니다. 지금도 그렇고."

"대단히 사려깊으시네요. 그것치곤 지금 혓바닥이 꽤 기신데."

 

남의 기분이나 자기 언행을 검열하는 것 치곤 그렇게 막 함부로 쑤셔대냐 는 의미를 담아 말을 던졌으나 그걸로 타격을 받을 거면 뱃속이 시커먼 인간이 아니었다.

 

"뭐, 사람은 배우면서 성장한다잖아요? 저도 누군가에게 배운거죠.

.... 그러고보니 그 분도 당신과 비슷한 얘길 했네요."

 

"그거 참 현명하신 분이네요. 인생 사는 법을 벌써 잘 알고 계셔. 어디 끝내주는 선생님이에요?"

"음- ... 제 형님이었답니다. 어릴때부터 여러가지를 배웠죠. 생각해보니 은근 카멜리아씨와 비슷하긴 했네요."

"우와....."

 

 

자길 닮은 어린아이의 선생? 어쩐지 자기보다 한참 작은 아이가 이쪽을 올려다 보는 상상을 하니 저절로 표정이 구려졌다. 그 흔한 새싹 하나도 키우지 못해서 nn번을 죽였는데(다행히 세자리수는 아니었다!), 살아있는 인간에게 자신이 뭔가의 멘토가 되거나 영향을 끼친다 생각하니 조금 끔찍했다.

 

 

"아 물론 그 분이 카멜리아씨보단 훨씬 좋은 분이었죠. 심술도 덜 부리고."

"아 예... 굳이 찝어서 선을 그어주시니 감사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