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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블룸_리크

쭉쭉 잇기 11

by 배추쿵야 2025. 2. 5.

https://wintertree90.tistory.com/395

 

https://wintertree90.tistory.com/396

 

(이번에 나오는 옛날 이야기의 앞부분은 4, 5편 참조)

 

 

 

 

 

"좋게 말하면 성실하고, 나쁘게 말하면 꽤 고지식했어요. 꼰대 소리도 제법 들었을걸요."

 

인간이 일관적이긴 쉽지 않다. 아무리 뚝심있고 팔색조처럼 살 자신이 없어 무미건조하게 살아도 쌓여온 시간과 기억은 하나가 아니니 희미하게나마 다른 감정, 다른 모습을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당장 자신만 해도 석 달 간 함께 했던 캠프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 따로, 직장선후배에게 보이는 모습 따로, 동네 어르신들에게 보이는 모습 따로, 꼬운 놈에게 보이는 모습이 또 따로 있지 않은가. 

 

"꽤 약하거나 인간적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 했어요. 나름 거기서 후계자 소리를 듣고 있었으니까, 그래야 했겠지만."

 

그 사람 이야기를 할 때의 남자는 꽤나 인간적으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애초부터 팔색조처럼 사는 인간들이야 마음만 먹으면 상대가 원하는 모습을 훔쳐서 즉석에서 보여줄 수 있으니 거기서 진심을 찾으려 하면 의미없을테다. 가면을 여러개 쓰고 다니는 인간들은 표면적으로라도 자신마저 속일 수 있었다. 어쩌면 저것조차 거짓말이라는 일말의 의심과 자기마저 속아넘긴다면 그 감정은 진짜인가. 하는 의혹 사이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들었다. 

 

" 누굴 대할 때마다 이렇게 팔짱을 끼고. 어디 한번 들어나보자~ 하는 얼굴로 있었죠. 아, 그런 점은 지금 카멜리아씨가 하는 거랑 꼭 닮았네요. 어릴 때는 그게 절 싫어해서 그런거라 생각했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니...형님도 이래저래 부담이 컸겠어요."

 

그제서야 리크는 팔 아래로 끼고 있던 반대편 팔을 빼냈다. 간만에 누군가와 일대일로 대화하다보니, 피곤해서  저도 모르게  긴장을 놓아버린 모양이었다. 허나 그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흐려져 허공을 보던 붉은 동공이 스윽 움직여 이쪽으로 향했다. 관찰인가, 싶어 그것을 마주하려 했지만 그는 관찰하는 대신 허공에 덧그리던 시선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정말 이빨도 들어가지 않을정도로 단단한데......"

 

스윽, 땅거미에 그림자가 길어지듯 검은 인영이 소리없이 가까워졌다. 어느새 남자는 허리를 숙이고 들여다보듯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제비꽃과 석산의 눈이 한층 가까워졌지만 오히려 그 눈빛은 까맣게 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왜 그렇게 꺾여버렸던 걸까....."

 

 

흡사 스타사파이어처럼 까맣게 실금이 가 깨어진 눈을 본 적이 있었다. 

꽃의 군락을 불태우려던 별빛의 마녀가 그를 저지하기 위해 나선 이들을 보며 오랫동안 담아왔던 한탄을 남겼을 때, 그 눈이 흡사 이런 모습이었다.

 

 

빛이 꺼진 것은 결론이 나 있으니 두렵지 않았다. 가장 무서운 눈은 균열이 생겨있는 모양이었다. 그건 마치 폭탄이 터진 뒤가 아니라 터지기 직전이 가장 위험할 때와 같은 말이었다. 

 

"그건-"

"뭐, 어쩌면 비겁하지 않아서 그렇게 꺾여버렸겠죠!"

 

 

그가 수없이 바꿔끼는 표정 너머로 무엇이 있는지는 몰랐다. 다만 자신은 위로와 공감은 서툴렀으며, 심리적인 폭탄제거는 더더욱 힘든지라 냅다 물이나 구덩이에 폭탄을 던져버리듯이 말을 잘라버리려는 순간이었다. 눈꺼풀이 깜빡, 이며 남자의 균열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미소가 그려졌다. 

 

"자, 그럼 사적인 얘기는 이쯤하고 일 얘기를 해볼까요? 백..아니, 나도 참 아직까지 이렇게 감상적이어서야. 일이 하나도 진행이 되지 않잖아?"

"...그..."

"잡설이 길었네요. 카멜리아씨-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하더라? 아, 기억을 봤다고 했지. 혹시 드림캐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아실까요?"

"그물같이 생긴게 악몽을 잡아준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안타깝게도 나쁜 것이 잡히면 좋은 것도 이런 걸로 잡을 수 있겠죠? '그물'이라는 건 뭔가를 걸러내고 잡는 도구니까요.

그럼 나머지 얘기를 해야겠네요."

 

 

 

 

 

- 딸의 주변에 이변이 일어난 것이 언제부턴지는 알 수 없었다. 애초부터 '이변'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너무 많은 것이 어긋나 있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피로를 호소하던 사람이 생기고, 간간히 뭔가를 깜빡 잊는 일이 잦아지더니 나중에는 맥을 못 추거나 아예 기억이 뭉텅이로 날아가는 증세가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일탈이나 개인의 실수로 치부하기엔 어려운 수준으로 늘어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 기어코 딸의 주변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옛 이야기의 난폭한 괴물처럼 주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과격한 방식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곁에선 모든 것이 죽은 것 마냥 무력해지고 많은 것을 빼앗길 뿐이었다. 

 

- 많은 이들의 세상이 잿빛이 되어 스러지는 와중에도 그녀 혼자만 붉게 아름다웠다. 

다른 사람들의 색채를 빼앗듯이.

 

 

 

 

 

 

이야기의 끝은 뻔했다. 만능인 것 같았던 비술은 사실 주변 사람들의 기억이든 기력이든 뭐든 빼앗아 에너지로 바꾸는 것이었고, 그 주술의 혜택을 받은 '딸'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도 놓지 못하다가 결국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람들을 끌어들였고, 참다 못한 사람들에게 토벌당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야기의 막바지쯤에 이르르면 그녀의 호칭은 '딸' 이 아니게 되었다.

 

 

 

- 그렇게 거미는 땅 속에 묻히고, 거미의 집은 부숴졌습니다. 

이제 그 독은 영영 대지에 파묻히겠지요.

 

 

봉인 끝! 만사해결! 로 끝나면 얼마나 좋겠냐만, 자고로 끝장을 내지 않고 봉인이나 파묻는 건 해결된 것이 없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 이야기가 오래된 괴담이 될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누군가가 이 터를 사서 집을 올렸으며 그곳은 또다시 집이 되고 방이 되어 훌륭하게 거미줄을 펼쳐 먹잇감을 기다리고 있는 꼴이 되었다. 예를들면 카멜리아의 기억이라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괴담의 현실화가 무서운게 아니라 기어코 땅값 싸다는 흉흉한 땅에 건물짓고 숙박비 온천비 따박따박 받아가며 혜택을 봤을 사장에 대한 실존적인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감히 이런 개같은 곳에 묵는데 00000엔을 받아? 

 

".....사장놈을 찾아야겠어요."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뭐가 붙어 있을지도 몰라요. 그동안 손님들에게 열심히 빨대 꽂아서 그런지, 결계가 강해졌거든요. 거미줄은 어지간해선 잘 떨어지지 않잖아요?"

 

"이걸 거미라고 부르지 말아줄래요? 아리아도스는 딱 자기 먹을 것만 먹고 치우지 구질구질하게 굴진 않아요....그래서, 내가 뭘하면 돼죠? 이것때문에 기억을 봤니 어쩌니 서론이 길었겠지."

 

"맞아요. 사실 혼자서 힘들게 해야할까- 싶었는데, 거미..아니, 여기 걸리고 이렇게 멀쩡한 사람은 흔하지 않거든요. 비결이 궁금하지만.......쓸데없는 호기심은 묻어두죠.

 

카멜리아씨, 도와주실래요? 아마 당신의 기억도 찾을 수 있을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