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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블룸_리크

[시점변경] 조각글에서 쭉쭉잇기 12

by 배추쿵야 2025. 2. 5.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다. 라는 말은 꽤 진부한 표현이지만 청자의 관심을 끄는 목적이라면 꽤 괜찮은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 분명 방에서 작업을 하다가 대충 널부러져 눈을 붙인 것 같은데, 천장이 아니라 본가의 금어초 꽃밭 한가운데 누워있는 건 단순히 개꿈이 아닐테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삼아 콘치떼가 바람을 타고 유영하듯 흔들리는 모습이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라 웃음이 나온다. 백아가 눈을 감은 것이 이것때문일까. 아무래도 중요한 일을 앞두고 감정적으로 굴면 힘드니 어찌보면 좋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거미줄'이 강해졌다. 제깟것도 슬슬 위험한 건 알고 있어 이렇게 침입자가 동요할 만한 풍경을 만들어 놓았겠지만 어쩌나, 이곳에 떨어진 것은 백아가 아닌 '나'였으니. 

 

오래된 원한을 접착제마냥  덕지덕지 발라놓은 땡중의 엉성한 그물은 성가시지만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백아라면 이걸 만든 인간은 형편없지만 거미의 염원이 강했다고 말했겠지. 겉옷에 묻은 꽃잎을 털면서 일어나 천천히 꽃밭 속을 거닐었다. 그리 거칠것 없이 잘 돌아다니는 걸 보면 백아가 훌륭하게 '장악'에 성공한 듯 싶었다. 그럼 이제 남은 일은 두가지였다. '매개'를 찾고, '그것'을 찾는다. 이 덫은 여러모로 써먹을게 많은 것이지만 그건 거미의 방식이 아니라 이쪽의 방식이어야 했다. 

 

꽤 오랫동안 거미줄을 뒤졌지만 특별히 위화감이 들거나 그리운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다. 전자는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 핵심이니 꽁꽁 숨겨놨을테고, 후자는... 사실 거미가 백아를 뒤흔들려고 그걸 보여줄거라 생각했지만 '나'를 생각한 건지, 아니면 그녀의 기억을 훔쳐간 것처럼 기억을 골라먹는 취향이라도 있는 건 지, 영 보이지 않았다. 

 

만약 괴이에 그런 '취향'이라는게 있다면, 옛 사람이라 그런지 꽤 구질구질한 취향이라 비웃어줄텐데.

 

 

 

시간이 지날 수록 역시 기존대로 플랜 B(불도저)로 가야겠다는 확신만 머리에 선다. 거미줄에 걸렸으나 파편 하나만 빠트리고 - 아마 거미가 의도적으로 집어갔을테다- 멀쩡히 걸어나온 그녀라면 이런 꽃밭은 그냥 예쁜 풍경에 불과할테니까. 눈도 날카로워 보이고. 

 

카멜리아.

 

척봐도 이런 부류에 관심도 지식도 없고, 이쪽과 관련이 없으나 재수없게 걸려든 외부인. 그깟 기억 하나 없어졌다고 잠잠하게 화를 내던 인간. 약을 올리든 좋은 말로 하든 휘두를까 싶어 손을 뻗으면 덤덤하게 물러나 날 선 시선으로 이쪽을 응시하면서도 또 한없이 연약한 어떤 것들에겐 관대한 눈을 보이던 인간. 손대면 스러지고 쉽게 꺾이는 예쁜 것을 오래오래 들여다보던 인간.

 

강렬한 색채의 꽃들 사이로 백아가 느꼈을 감각을 따라 움직였다. 그녀는 백아에게 낯선 존재니 이곳에서 가장 이질적인 것을 찾으면 되었다. 꽃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칼을 닮은 인간. 그러면서도 가장 좋아하는 것은 꽃과 우연히 지나치듯 보았던 연약한 날개를 지닌 황충의 포켓몬. 

 

어쩌면 그리 별거 아니라는 듯이 무던한 얼굴을 하고 스스로를 닫고 있는 것은 그걸 지키기 위해서겠지.

 

"꽤 휘젓는 재미가 있을 것 같은데."

 

 

 

발길 닿는대로 걷다보니 길 옆으로 길게 뻗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진녹색을 띈 반질반질한 잎을 보아하니 이건 동백나무였다. 본가의 가주님께서는 제법 그윽한 정취를 즐기시는지라, 겨울에도 꽃을 보는 것을 꽤 좋아하셨다. 대책없이 화려한 모란, 개화와 낙화가 극적인 금어초, 그리고 눈 위에 뚝뚝 떨어지는 적동백까지. 이따금 눈이 쌓일때마다 뒤뜰로 향하면 눈밭에 어지러이 떨어진 동백을 주워서 가져갔던 것도 같다.

 

나무에 시선을 두자 일제히 기지개를 켜듯 가지에서 꽃이 피어난다. 그림자처럼 어두운 잎 사이로 붉은 꽃잎이 열리는 그 사이에, 단 한송이 눈을 닮아 반짝이는 하얀 꽃잎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저것이다. 저 흰 동백꽃(Camelia)이 그녀가 간절하게 찾던 기억이었다. 이걸로 이제 거미줄을 휘젓고 다닐 이를 부려먹을 값은 충분했다. 조금 다급해진 마음에 손을 뻗어 그것을 움켜쥐듯 꺾자 꽃잎이 닿는 감각이 꽤 보드라워 그것의 목을 딴 뒤에 내려다봤다.

 

그리 무심하게 굴던 이가 답지 않게 흥분하던 것, 그만큼 누군가의 소중한 기억이 주는 감각은 풍성하고도 연약해서 한번 주먹을 꾹 쥐었다가 펴보면 어떨까 심술이 났다. 천천히 꽃을 구기듯이 접었으나 끝내 힘은 들어가지 않았다. 

 

끝을 앞두고 있으니, 이런 장난은 잠시 접어두는게 낫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