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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9] Long live the King

배추쿵야 2023. 11. 20. 01:04



유난히 피곤한 밤이었다. 라스와 50%는 불안함을 떨치기 위해, 50%는 제발 그런일이 없어라는 기원 같은 걸로 말했건만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건지. 

25년. 한 사람이 온전히 성인이 될 정도의 시간까지 이 지방을 다스리고 옥좌에 앉아있던 왕의 치세가 끝날 때가 왔다. 다만, 정점에 자리잡고 이곳을 정성스레 가꿔온 이의 집념과 미련 그리고 왕으로서 지고 있던 짐의 무게가 상상 이상이었는지, 선정을 펼친 왕은 결국 영원히 이곳을 지배하기로 마음을 먹은 듯했다.


"결과를 생각해 주세요.
끝이 좋아야 괴로웠던 과정이 아름답게 비춰지는 법이랍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생각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아름답고도 거대한 성벽을,
그 성벽의 주인을.


무대에서 처참히 깨지고, 자신이 실패했음을 깨달은 순간 떠올랐던 것은 자신을 둘러싼 안온한 성벽이었다. 지루하고 고되며, 모래를 씹는 듯 무미건조한 시간을 쌓겠지만 그 끝에는 분명 차고 넘치는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의 인정과, 어디서든 당당할 수 있는 지위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과 배경까지. 

메리골드 그레이가 쌓아올릴 성벽은, 아버지의 청사진 대로라면 완벽하고 더없이 견고하며, 훨씬 웅장하여 늘 두려웠던 가족을 뛰어넘고도 남았을 것이다. 약간의 고된 과정을 거친다면, 약간의 무게를 견딘다면, 조금 더 이 공허함에 익숙해진다면.

성벽 바깥은 제 뜻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잠자리 하나부터, 공부, 포켓몬 훈련까지. 하나하나 제 손으로 모든 것을 해야 했기에 막막했고 아찔해서 몇 번이고 집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늘 따라붙는 시선이, 그 질책이, 평가가, 자신을 감시하는 성벽의 주인에 대한 공포가 너무 강해서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것은 기회였다. 아버지가 옳다는 것을 증명했으니 자신은 돌아온 탕아가 되어 잘못을 뉘우치며 얌전히 돌아간 뒤, 안정된 계획 속에서 정해진 자리에 오르면 그만이었다. 한번 방황한 댓가를 치러야겠지만, 그건 '결과'에 다다르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고 비로소 완벽한 가족으로서 인정받을 것이다. 

 

그러니 괜찮아,
익숙한 고통을 견디면 나는...


-

 


[ 언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화면 가득히 동생과 알람, 고글의 얼굴이 보였다. 표정이 대놓고 좋지 않았는지 걱정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뉴스에 사고가 있었다고 떴었지. 가드니아가 걱정되어 확인차 전화를 걸었던 것이 떠올랐다. 괜찮다 생각했는데도 어지간히 혼을 빼놓고 있었나보다.

"그.. 그 정도로 안 좋았어?"
[ 말도 마. 거의 나랑 언니 처음 만났을 때 죽상 짓던 거 생각났어. 
얘네 표정 봤어? 언니 많이 힘들어? 캠프에서 무슨 일 있었어?]
"괜찮아. 그냥 지나가다가 좀 심란한 얘길 들었어."

알람과 고글을 보았다. 자신의 일탈에 휘말려 죽도록 고생하다가 기어코 하나는 이전처럼 움직일 수 없게 되어버린 파트너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자신의 옆에 머무르고 진지하게 걱정해 주는 포켓몬들.

 

그리고....자신이 안온한 감옥으로 되돌아 가려 할 때 다시 한번 더 멀리 도망치도록 붙잡아 준 가족들을.

 

"가드니아,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걸까?"

[ 엥? 갑자기 왜 그렇게 철학적인 질문을 해.... 흐음- 난 모르겠네. 근데 그거, 말하는 사람 본인 기준 아냐? 보통 그러던데. ]

"그렇지."

 

완벽한 과정이 완벽한 결과를 도출할 수 없었다. 때로는 과정이 완벽하더라도 결과가 실패할때도 있었다. 당장 삶의 많은 예시를 끌어오기 이전에, 체육관 도전에 실패할때마다 자신이 밤을 새어가며 전략을 짜던 그 모든 시간이 헛되게 되었다는 막막함에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니 적어도 상처투성이인 과정이라도 결과가 좋다면 뭐라도 남는게 차라리 나았다. 

 

자신이 이 절망을 겪지 않았다면 그 말에 두말없이 동의했을 것이다.

절망에 벗어나려고 허우적대는 시간동안 아이는 어른이 되었고,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번째는, 자신은 꽤나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결과만으로 무시하기엔 과정이란 건 생각보다 비중이 컸으며,

그 결과물인 성벽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하다 못해 내심 박살내고 싶다는 비틀린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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