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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그것은 그리움이었다. 이제는 익숙하게 시야를 가리는 하얀 눈발 속에서 낯익은 얼굴을 찾았다. 기억 속 무기력하고 우울하던 얼굴이 아니라 조금 많이 섭섭했지만 비석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제법 빠릿하게 움직인다든지, 옆에 웬 무식한 망치를 든 쬐끄만걸 달고 다닌다든지 이전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지만 그리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이왕 떨어져 있던 거, 재미없이 지루하게 죽상으로 다니는 걸 보다가 이걸 보니 나쁘진 않았다. 이 성가신 날씨에 무언가를 계속 찾았는지 새빨개진 볼을 한 채 쉬지 않고 이리저리 움직이던 발길이 이쪽을 보고 딱 멎었다. 그리고... 자신을 담은 눈이 순식간에 들이치는 소나기마냥 젖어드는 순간, 안심했다. 너도 날 계속 찾고 있었구나. 상처입히기 위해 첫 친구를 계속 찾아 헤매던 나처럼.네가.. 더보기
8. 시점을 바꿔보자 여기 원한이 씌어 만들어진 포켓몬이 하나있다. 흔히 고스트 포켓몬들이 그렇듯이 이 포켓몬이 정확히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딘가의 어둠대신이 쑥쑥 자란 개체일수도 있고, 전해지는 이야기처럼 버려진 것에 무언가가 씌여서 변해버린 개체일수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다크펫에게는 꽤나 재밌고 사랑스러운 첫 친구가 있었다는 점이다. 전형적으로 제가 보기에 사랑스러운 것들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것이 수시로 바뀌며 아는 놀이가 많았지만 다소 쉽게 질리는 친구였다. 사실 그정도 변덕이야 어린아이에게는 흔한 성질이었으니 그리 거슬리진 않았다. 적어도 하루에도 몇번씩 바뀌는 장소와 놀이, 대화에서 자신은 친구와 늘 함께 있었고 그 모든 순간이 즐거웠으니 그것으로 좋았다. 다만 좋아하는 것도, 좋아해주는 것도 많던.. 더보기
7. 제형시티 '몸과 마음의 짐을 기꺼이 나눠 들어주는 마을'. 제형시티를 설명하는데 이이상 완벽한 요약이 없다. 병원을 포함한 의료시설이 많아 전반적으로 정갈한 색채를 띈 이 마을은 발 딛는 도로부터 근처에 보이는 작은 가게까지, 어느 하나 배려가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었다. 거동이 불편한 사람도 쉬이 이동할 수 있도록 도로는 거슬리거나 급격한 경사가 없이 완만하고 깔끔했으며, 건강한 사람들과 조금 회복이 필요한 사람들 사이에서 연구원들이 부지런히 다니며 사람들을 살피거나, 삼삼오오 모여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감각을 심하게 자극하거나 스트레스를 줄 요소도 없이 평온하면서도 치료를 하는 사람들과 받는 사람들이 조화롭게 교류하고 있었으나, 잠시 귀를 기울이면 어김없이 '생명교'에 대한 이야기만이 이 평온함 사이를 .. 더보기
6. 연지섬 소녀의 기억속에 있는 바다는 끊임없이 밀려오고 부서지길 반복하는 파도와, 그 앞을 가로막는 커다랗고 거친 절벽의 모습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비로소 평화를 찾은 연지섬의 해변은 늘 막연히 생각하던 그림책의 삽화나, TV에서 매년 여름철마다 지나가듯이 보여주던 꿈같은 모습 그대로였다. 넓게 펼쳐진 백사장이라든지, 흡사 에메랄드나 아쿠아마린이 생각나는 녹색의 바다라든지. 뾰족한 바위나 둥글둥글하게 닳은 조약돌 대신 반짝이는 고운 모래가 한 손 가득히 잡혔다가 불어오는 바람에 스르르 빠져나가는 감각이 묘하게 허망하면서도 간질간질해, 몇번이고 한 줌씩 집었다가 다시 흩날리기를 반복했다. "양배추야, 그거 알아? 이런 고운 모래나 재로 유리를 만들 수 있대."- ...... 풍경도 제 일이 아닌 것 마냥 무심히 .. 더보기
회상 https://wintertree90.tistory.com/571 에서 이어집니다. 실툿마을의 공동묘지는 소녀의 놀이터였다. 누군가가 듣는다면 1. 장소가 마땅찮다 / 2. 함께할 상대가 마땅찮다 / 3. 어딘가의 오컬트 마니아적인 취향이 잘못 스친것이다. 고 짐작하겠지만, 소녀에게 있어서 묘지는 정말로 즐겁게 노는 곳이라기보단 시간을 죽이러 가는 곳에 가까웠었다.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막연히 책에서마냥 하늘을 보며 기도를 해도 보호자들에게 깊게 패인 골은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집에서 슬퍼하는 가족을 무력하게 보는 것도 괴로운 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공동묘지는 소녀에게 있어서 좋았던 기억이 남은 장소였다. 묘지를 돌아다니며 그 앞에 놓여진 마른 꽃다발, 잡다한 소품, .. 더보기
약속의 반지 (w. 케이시) 거대한 도시의 장점은 사람이 많다는 것이고, 사람이 많으면 좋은 것, 귀한 것이 몰리기 마련이었다. 티르시티는 그런 의미에서 실툿마을과 다른 의미로 많은 것이 활발하게 흐르고 겹쳐지는 곳이었다. 전 지역에서, 혹은 외부에서 축제를 즐기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물결마냥 흐르고 그 흐름 사이에 다양한 크기의 노점과 가게가 하중도마냥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행인들은 물고기마냥 흐름을 따라 걷다 간헐적으로 노점 앞에 멈춰서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시라와 케이시 역시 그러한 풍경에 포함된 행인 중 하나였다. 다만, 멀리서 보는 것과 가까이서 보는 시점이 다르듯이 둘의 눈에 가득담긴 것은 노점상들이 펼쳐놓은 각종 공예품들이었다. 몬스터볼을 달 수 있는 자수 벨트, 질긴 끈을 엮거나 가죽을 붙여 만든 허리띠, 종모.. 더보기
5.5. 옛날 옛날 태양을 동경한 한 인간이.. 소녀가 많은 재료 중 하필이면 실을 주력으로 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첫번째는 가장 많이 본 모습이 실 공예라는 점이었고, 두번째는 자신을 가르친 어머니와 할머니가 그것을 전문으로 한다는 점이었다. 특히 외출하기 어려울만큼 눈보라가 치는 날이나, 유난히 긴 무송마을의 겨울밤을 지새우다 드문드문 나오는 TV 프로그램도 질릴 때면 소녀의 조모는 어김없이 실 한꾸러미를 들고 무언가를 뜨거나 가느다란 실로 무언가를 짜고 있었다. 평범하게 실을 섞어가며 뜨개질을 할 때도 있었으나, 소녀가 제일 좋아하는 모습은 벌레포켓몬들의 실을 섞어서 위빙을 하거나 엘풍에게서 뽑은 보드라운 면사로 레이스를 뜨는 것이었다. 그것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 이따금 제일 화려하고 잘 나온 것은 늘 자신의 몫이었다- 하염없.. 더보기
5. 티르시티 (심적인 혼란과 과거의 일부 묘사가 있습니다.)(캐릭터는 좀 불안하지만 힘내서 마음을 잘 다스리고 있습니다! 축제도 재밌었습니다!) " 영생을... 살... 살아서... 어?! 나는...!!! " 취객은 축제가 있다면 흔히 마주하게 되는 당황스러운 이벤트겠지만, 술의 힘이든 맹목의 힘이든 제정신을 잃어버린 이를 마주하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몸, 머릿속에 가득찬 생각이 채 정리되지 못하고 넘치듯이 우수수 흩어져 떨어지는 언어, 짙게 풍기는 포도주의 냄새까지. 이 모든 감각이 잔뜩 날이 선 머릿속을 헤집으며 몸을 굳게 만들고 있었다. 저절로 떨리기 시작하는 손을 억지로 기도하듯 부여잡으며 얕아지는 숨을 고르고 있으려니, 순식간에 커다란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