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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않은 편지

배추쿵야 2022. 8. 10. 20:59

선배에게.

 

 

원래는 직급으로 부를까- 했지만, 우리에게 제일 붙으면 안 되는 호칭이 과거의 자리니  좀 더 친숙한 호칭으로 부르겠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으니 꼭 젊은 날로 돌아간 것 같네요.

 

선배, 독방은 괜찮으십니까? 비록 선배님이 버린 목숨이 수십수백명이지만 그로 인해 수백수천의 목숨을 구했으니, 아마 조직에서도 공을 인정해서 각별하게 모시고 있을 겁니다. 하루 종일 감시당하고, 일정 범위 이상으로 나갈 수 없는 데다 외부와의 접촉도 극도로 제한되겠지만, 적어도 그곳에 있는 수많은 수형자들과 달리 선배의 명예 정도는 지켜주려고 할 테니까 입는 것, 먹는 것, 자는 것도 다르겠지요. 이 편지가 전해지지 않을 것을 아니까 이렇게 쓰는 거지, 아마 편지가 전해진다면 선배의 건강을 해칠 수도 있겠습니다. 혈압이라든가요.

 

선배,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일이 터지다 못해 이름모를 목소리에게 끌려가 과거까지 바꿔버렸습니다. 한때 황량하고 메마른 땅에 내린 황폐함이 잠들고 생명과 균형이 깨어날 예정입니다. 다시 돌아간 미래에는 많은 것이 바뀌어 있겠지요. 어쩌면 선배가 무심하게 써버린 목숨도 살 수 있을지도 모르고, 동시에 선배의 죄가 조금이나마 가벼워질 지도 모릅니다.

 

선배, 기억하십니까?

저는 아직까지 그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단신으로 쳐들어가 과감히 당신의 명예에 칼을 겨누며 대치할때- 나이가 있으셔서 오해하실까 봐 말하는데, 진짜 칼은 겨누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미래인' 아닙니까?- 문이 열리면서 후배들과 부하들, 살아남은 동기들이 떼로 몰려들어와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지요. 그리고 '선고' 했지 않습니까?

 

당신이 목숨으로 쌓아올린 탑과 집무실에서 숨어있던 많은 이들에게 몰락을 맞이한 것처럼, 세계의 균형을 망가뜨린 왕이 타인의 고혈로 쌓아 올린 화려한 궁전에서 몰락을 맞이했습니다. '군중'을 이끄는 리더, 그를 따르는 '군중', 그리고 숨어있던 자, 지켜보던 자, 두려워하던 자들이 함께 궁으로 쳐들어갔습니다. 그야말로 축제 같더군요. 

 

선배, 제 목숨을 갖고 놀듯이 저를 여기저기 돌리면서 죽일 지 살릴지 고민하던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살리자니 내가 당신이 하는 일에 훼방을 놓고 사람들을 숨기고 빼돌릴 테고, 죽이자니 당신이 믿고 맡길 이가 줄어드는 것이 싫었겠지요. 당신이 쌓아 올린 탑에서 어떤 심정이었는지 이해합니다. 고독함이라는게 원래 그렇잖습니까? 

 

하지만 선배,

그렇게 남의 목숨을 장기말처럼 갖고 놀 것이었다면 혼자되길 각오했어야지요. 당신이 감히 사람 목숨을 말처럼 갖고 노는 동안, 많은 이들이 같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당신에게 반기를 들던 이가 저뿐이었겠습니까? 그저 소란을 피운 것이 나뿐이었습니다. 

 

동경했던 선배,

한때 제가 열렬히 좇던 태양과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이 나이 먹고 다시 생각해보니 태양에 가까이 다가간 남자가 왜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인간은 결코 태양이 될 수 없습니다. 태양이 되는 순간 인간이 아니게 되고, 인간들에게 공감할 수 없을 테니까요. 제가 당신을 이기고 그 탑을 무너트릴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신에게 공감하고 찬동하는 이들만큼 반박하고 다른 것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 또한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 날, 당신의 공간에 들이닥쳐 몰락을 선고하던 사람들, 당신이 쌓아 올린 무게를 보여주며 끌어내리던 사람들, 조직을 부흥시킨 리더가 아니라 사람 목숨을 우습게 아는 죄인이라 말하던 사람들. 그 모두를 모으느라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당신이 '어쩔 수 없다'라고 하면서 잘라내던 것들이었고, 그렇게 버려진 목숨이 불러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보호하고 끌어내고 서로 만나게 하여 공감하게 한 다음, 뜻을 모으게 했습니다. 아주 뛰어난 인재들이니, 서로 뜻이 맞다는 걸 확인하니 그 뒤로 일사천리더군요. 제가 왜 선배를 볼 때마다 시비를 걸고 방해했는지, 아시겠습니까? 큰 일은 보통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잖습니까.  

 

 

 

선배,

당신이 왜 그런 길을 택했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 이 지긋지긋한 시소게임을 끝내거나 한쪽으로 기울이고 싶었겠지요. 당신이 아끼던 것들도,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도, 당신이 미워하고 미움받는 자들도 모두 인간이었습니다. 과거에도 그런 시소게임은 계속되어서, 상처받은 것들이 많았습니다. 이곳에 처음와서 마주하게 된 눈발보다 더 싸늘한 의심과 경계라든가, 말이 통하지 않아 억울하게 내쫓기거나 상처받은 생물들의 분노라든가, 기울어진 천칭에 매달려 그 일그러짐에 기생하거나 일조하는 자들이라거나. 당신은 높은 곳에 있었으니 그 일그러짐을 더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가능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 의미 없이 느껴졌겠지요.

 

 

그래도 선배, 

그 시소게임을 정상으로 만든 것도 인간이었습니다. 빼앗긴 자들, 상실한 자들, 쫓기던 자들, 절박한 자들이 모여서 이 기울어짐에 환멸하고 개탄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커다란 일그러짐이 사라졌고, 그 위에서 짓누르던 왕좌가 사라져 그 공백이 또다른 혼란을 야기할 수 있겠지만 이전만큼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알고 계십니까 선배?'우리'들이 쫓겨난 뒤에도 세상은 놀랍도록 평범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선배의 후임으로 온 사람은 평범하게 바쁘고 골머리를 앓으며 조직을 운영하고 있고, 부하직원들도 여전히 일이 고되다고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당신이라는 질서가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멀쩡히 돌아갑니다. 당신은 유능했지만 마냥 옳은 것은 아니었단 의미입니다.

 

기억하십니까, 선배?

 

선배가 쫓겨날 때 내게 했던 말 말입니다. '자네가 지키려 했던 것들이 자네를 끌어내릴걸세' 라고. 어떤 말인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도, 나도, 인간이면서 태양에 가까이 가려하는 못 말리는 왕구리들이니 언젠가는 몰락했겠죠. 아니면 내가 고민과 번뇌에 지쳐 당신과 같은 방식을 쓰거나. 영웅 이야기는 원래 추락하는 것이 엔딩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전 그런 고대적 영웅 설화보다는 어떻게든 잘 지냈습니다~같은 요즘 히어로 이야기를 좋아해서 말입니다.

 

거대한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맞서려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았고, 바르게 돌려놓으려 애쓰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이기적일지언정 양심에 찔려하는 인간들은 꽤 대다수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선배,

저는 그래서 태양이 좋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따뜻하게 비추는 햇살을, 태양을 동경하는 것입니다.

1호는 땅으로 떨어졌으니, 경각심을 갖긴 커녕 죽어야 고쳐지는 고집쟁이 2호는 계속 태양을 바라보겠습니다. 땅 위에 발을 딛고, 사람들 사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