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르로 출장 겸 동기들에게 조언을 구하러 간 리시안과 그를 기다리는 칼렌의 짧은 생각.
Side. L.
슛시티는 가라르 최대의 도시인만큼 다양한 시설과 잡다한 가게, 그 중에서도 꽤 고급진 티룸이나 카페도 제법 있었다. 현재 셋이 앉아있는 자리는 그 중에서도 테라스 자리가 꽤 넓고 볕이 잘 드는날이면 일광욕하기가 좋다고 소문난 카페의 한 구석이었다.
모자를 눌러 쓴 분홍색 머리의 남자 하나, 하얀 가운을 입고 도치마론 한마리를 무릎에 앉힌 날카로운 인상의 여성 하나, 그리고 짧게 자른 흑발을 멋들어지게 넘긴 뒤 독특한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여성 하나. 의상 조합은 다소 제각기였지만 앉아있는 것이 그리 어색하거나 거리감이 있진 않아보였다.
“그래서, 신분을 어떻게 만드냐...그걸 물어보러 왔다고?”
“응...뭔가 따로 복잡한 절차가 있을까, 싶어서. 성인이기도 하고.”
리시의 대답에 나츠메는 의아한 표정으로 한쪽 눈을 찡그렸다.
리시안 먼로가 찾은 포켓몬, 그 중에서 버려진 개체는 여러마리 였지만 그걸 끝까지 책임진 것은 먼로와 오하라 단 둘 뿐이었다. 돌아갈 곳이 없는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는 것과는 별개로, 자신은 그 포켓몬들이 머물 곳이 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좀더 잘 돌봐줄 사람과 다른 단체에게 맡기는 것으로 끝냈다. 그게 옳은 것이었고.
먼로야 의사소통이 좀 힘들었을 뿐, 크게 가리는게 없어 걱정할게 없었고 오하라는 아카데미에 있을 시절에 만났으니 천천히 시간을 들여 케어할 장소와 수단, 그리고 조언을 줄 사람들이 많았다- 실제로 동기인 포트라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다만,
이번에 ‘줍게 된’ 것은 사실 보통 사람이라도 겪기 어려운 일이었으니 머릿속으로 생각이 많아지다 못해 엉켜있는 상태였다. 신원불명의 ‘먼 과거’에서 온 ‘성인남성’. 그것도 예전에 한가닥했을것 같은 성인남성이라니. 자신의 능력을 아득히 넘어서는 상대를 어떻게 대할 지 몰라 방황하다 일단 ‘신분’을 주기 위한 준비를 하기로 했다.
몇개월 전에 알게 되었지만, 아카데미 동기인 ‘피’는 명확한 신분이 없었다고 한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생각해보면 어릴때 신분을 등록해주는 이가 없으면 자연스럽게 무적자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시스템에 등록이 되지 않은 인간이라도 엄연히 살아서 자기 인생을 살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피가 새로 신분을 얻은 것은 동거인이자 연인인 나츠메의 도움이 있었다. 물론 등록과정에서 성인이니 이것저것 묻거나 하는게 있겠지만, 시스템에 등록하는 절차를 정확히 파악하고 필요한 요소만 갖춘 뒤 다소 번거로운 몇가지만 통과하면 되는 일 이었으니까, 별일없이 박사로서 일하며 지내고 있었다. 몇 달전에 연구소에서 지낸다는 소식을 들었을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30초반 추정의 정체불명의 성인남성은 신분등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사장님의 도움을 받을까 했지만 타이밍 좋게 연락이 되지 않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실례가 될 걸 알면서 둘을 불러 어렵게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표정은 짜증이나 무례하다고 책망하기보다는...진심으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
하나지방의 신분등록 절차는 정확힌 모르지만… 서류만 잘 갖춰서 절차만 밟으면 아이디카드가 발급 될 걸?”
“어…?”
“응…. 관동쪽인가 성도쪽은 예전에 신분등록이 좀 힘들었다고 하지만.. 다른 곳은 등록이 의무가 아니라 그런식으로 뒤늦게 찾는 사람이 흔하다고 들었거든.”
피 역시 노곤노곤하게 늘어진 도치마론을 쓰다듬어주다가 나츠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기억하는 얘기를 꺼내며 눈을 깜빡였다. 심란한 생각과 한참 떨어지다 못해 너무나 명쾌한 둘의 대답에 리시안은 잠시 눈을 크게 뜨고 있다가 곧 당황으로 눈이 핑글핑글 돌기 시작했다.
“설마, 그거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물론 그것만 물어볼건 아니었지만..!!”
“한 50%는 그런 생각이었다- 이거구먼.”
“........하지만..!!”
…...사람 주운 건 처음이라서…
밀려오는 삽질에 대한 자각과 부끄러움에 끝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한참 고뇌한 끝에 나온 이 모든 삽질에 대한 대답에 나츠메는 눈을 가늘게 뜨며 에이드를 쪼옥 빨아마셨다. 녀석, 경황이 없구먼. 은은하게 지켜보는 듯한 시선에 저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혹시 알아? 세레비때문에 시공을 넘어서 왔다고 하면 좀더 집중 케어 해 줄지도 모르지.”
“환상의 포켓몬이잖아.. 그걸 누가 믿어줄까?”
“못 믿을것도 없지. 당장 메로엣타 라든지, 우리가 본 것도 협회에서 알고 있는 것 같던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스승님의 친구와 섬을 악몽에 빠트린 그믐달의 포켓몬. 전설을 넘어 아득한 환상의 존재라 생각한 포켓몬을 둘이나 보고 나니 시공을 넘나든다는 숲의 신을 믿는것도 그리 허황된 이야기는 아닐것이다.
하지만, 환상의 포켓몬이 개입되었다는 것만으로 시선을 받게 된다면 그 사람은 싫어할 것이다. 그저 조용히 유유자적하게 떠도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고, 갑자기 변화한 환경도 알게 모르게 그에겐 압박이 될테니까.
“그건..좀더 생각해보려고.
그래도 고마워, 나츠메랑 피가 아니었으면 혼자 생각하다가 엉뚱한 데로 튀었을거야.”
“뭘 그렇게 걱정해. 물론 세상에 수상한 사람을 경계해야 되는 건 맞지만, 도와주기로 했으면 이것저것 재지 말고 그냥 도와주라고.”
“정말 이상한 사람이면 리시가 피했겠지. 그래도 도와주겠다는 건 손해보진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잖아.”
나츠메도 속으로는 내심 고민도 많고 생각도 많겠지만, 적어도 한번 정한 것은 어찌되든 명쾌하게 밀어붙이고 일관적으로 나서는 점이 좋았다. 노력하는 재능이라는 건 그 일관성에서 비롯된 것일터. 어쩌면 다시 먼 여행을 떠나려는 피를 붙잡을 수 있었던 것도 한번 정한 것은 어떻게든 확실하게 행동하는 나츠메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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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e. C.
집주인은 종종 출장을 나가기도 했는데, 이번 출장은 가라르 지방이라는 곳이라고 했다. 약 일주일 비어있는 동안 칼렌이 한 것은 인근 지리를 익힌다거나, 리시안을 찾으러 온 이웃 주민 몇에게 인사를 한다거나 하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멀리 돌아다니지 못하니 좀이 쑤시는 건 있었지만 애초부터 혼자 지내는 것이 익숙해서 조금 심심하다는 걸 제외하고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이곳을 나가게 되면 어떻게 지낼까, 정도? 사무실과 오피스텔에 있는 책을 몇장 뒤적여 봤지만 구미가 확 당기는 이야기나 소재는 없었다.
애초부터 자신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도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으니, 크게 막막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럼 이 먼 미래에서도 용병이라는게 있을까? 저번 대화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했을때 영 이해를 못하는 눈치는 아니었으니 아마 비슷한 일은 있을터.
책상위에 놓인 몬스터볼이 데구르르 굴러와 몇번이고 항의하듯이 팔에 부딪쳐왔다. 처음 마수들과 인간들의 관계를 보았을땐 먼 미래는 마수들을 온전히 길들이는데 성공했나 싶었지만 아무래도 온전한 공존보다는 복종시킨 것에 가까운 듯 보였다. 이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크기의 포획도구에 잡히는 순간, 어떤 인간들이라도 역량만 된다면 마수들을 길들일 수 있었다.
물론 촥촥이는 볼에서 꺼내자마자 침을 퉤 뱉듯이 물을 이마 정중앙에 날려버렸지만 밖에서도 꼴사납게 펄떡이지 않는걸로 봐서 도구의 마법같은게 있는 모양이었다.
“여섯마리라고 했지.”
도구의 힘을 약간 빌려 데리고 다닐 수 있는 마수의 수는 최대 여섯. 이건 길들이는 걸 넘어서서 케어하는 문제로 봐도 적당했다. 지금까지 셋을 데리고 있으니 이걸 쓰면 세마리는 더 데리고 다닐수도 있었다. 집의 문제야 이 도구가 해결할테니, 한결 마음 편하게 마수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뒤에서 누가 불만스럽게 노려보는 시선이 꽂혀왔다. 그도 그럴것이 고대의 마수이자 20년이 넘도록 온전히 길들여지지 않은 누에게 있어서 저 도구는 손쉽게 그 노력을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으니 어찌보면 모욕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집주인이 이 볼을 쓰겠냐는 말을 꺼냈다가 말없이 몬스터볼이 하나 박살나기도 했고.
[ 네가 싫으면 어쩔 수 없지만...혹시 모르니까 조심해.
잡히면 버튼이 닫히지 않도록 이쪽을 노려서 내부에서 부수고 나올수도 있으니까..]
누 가 진작에 자리를 뜨지 않고 이곳에 조용히 머물러있는 건 아마 4할 정도는 그 집주인의 덕일것이다. 영리한 녀석인만큼 진심으로 미안해 하는 얼굴에 대고 자기에게 하던 것처럼 날뛰는게 영 보기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니 어색함 반, 민망함 ¼ , 일단 지켜보자 ¾ 정도의 생각으로 지금 얌전히 집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집주인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인데, 누.”
[.......]
길들인다는 것은 그런 것일까?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인다거나- 복종의 의미를 제외하고는- 기꺼이 먼저 한껏 굽힌 적이 없던 그로서는 이런것이 꽤 어색했다. 집주인에게는 더없이 쉬웠지만 자신은 해 본적도 없고, 할 생각도 없는 짓. 스스로를 낮추는 것은 곧 상대의 손에 자신의 목을 맡기는 것이니까.
“간이 큰 건지, 없는 건지.”
그럴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다시 한번 첫 인상이 생각났다. 기꺼이 다정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의 목을 상대에게 낼 인간. 자신의 것을 빼앗길 인간. 무해한 이라 쓰고 무력한 이라 읽을 , 오래 살 수 없는 인간.
적어도 제 것을 빼앗거나 해하지 않을 이니까 건드릴 의미도 없었지만 역시 그렇게 여러의미로 무모한 인간을 보면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참 딴 생각에 빠져있으려니 구석에 놔둔 기계에 불이 들어왔다. 집주인의 말로는 멀리서 대화할 수 있는 것이고, 가기전에 전화를 한다 했으니 아마 전화를 건 쪽은 그쪽일 것이다. 알려준대로 버튼을 누르자 화면에 익숙한 색이 가득찼다.
-아, 형이에요? 일이 끝나서, 지금 전화했어요.
“그래? 굳이 전화까지 안해도 되는데.”
-그래도 언제오나 시계만 보고 있는것도 지루하잖아요. 출발하기전에 미리 전화하려고 했어요.
“딱히 연락하진 않아도 돼. 여긴 네 집이잖아.”
-하지만... 형이 거기 있잖아요. 저도 혼자 왔다갔다 하는 건 심심하니까 얘기라도 들어줬으면 해서 전화했어요.. 먼로랑 애들은 잘 지낼까요? 누랑 부기는요?
“별일없어. 네가 알려준대로 챙겨주니까 조용하더라고.”
-잘됐네요. 아마 내일 출발할테니까...아마 모레쯤이면 도착할거에요.
집주인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작은 요정같은 마수들이 우르르 모여서 칼렌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금방이라도 보고 싶은지 있는 힘을 다해 깡충깡충 뛰고 있어 기계를 넘기자, 우르르 모여서 화면에 작은 두 손 (혹은 발)을 얹고 무어라 정신없이 앞다투어 이야기하고 있었다. 예의 그 활짝 피어나듯이 웃는 얼굴로 마수들과 얘기하는 것을 구경하며 생각했다.
뭐가 그렇게 좋은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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