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었다. 정확히는 여름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과 공기가 머금은 습기가 만나 날씨가 제법 변덕스럽게 변하고 있었고, 시도 때도 없이 소나기와 잔비가 번갈아서 내리는 계절이었다. 칼렌의 포켓몬들은 오히려 이런 날씨를 좋아해서 날이 흐릴때마다 튀어나가 실컷 즐기다 오고 있었다.
다만 인간은 물포켓몬이 아니라 이런 날일수록 집과 건물안에 굳건히 박혀있었지만, 칼렌은 이 또한 금방 질려 산책을 핑계삼아 밖으로 나돌았다. 비가 조금 오면 어떤가, 파도가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춥거나 배고프지도 않고, 여차하면 돌아갈 곳도 있으니 노숙할때와 비교하면 정말 바람을 쐬는 것에 가까웠다.
포켓몬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당연히 한 곳이었다. 부둣가를 돌아다니는 포켓몬들을 구경하다 고개를 드니 해무가 자욱하게 껴 있었다. 폭우도 아니고, 파랑 주의보도 없었지만 뿌연 안개가 바다를 시야에서 잘라내듯 가리고 있는 모습이 꽤나 불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바다를 낀 도시는 비가 올때마다 항구에 흐린 물안개가 자욱하게 꼈다. 물풍경시티의 이명처럼 언제나 바깥에서 하나지방으로 거대한 선박들이 찾아오는건 당연했지만, 이런 날에는 사고를 우려해 그마저 드물었다. 한치 앞도 보기 어려운 뿌연 시야 너머로 이따금 날을 잘못 맞춰 찾아오는 배들이 항구로 서서히 다가오는 모습은 아득히 먼 세계에서 미지의 존재가 다가오는 것 같다- 고 누군가가 그랬던 기억이 있다.
저 멀리서 바다만을 가리고 있던 뿌연 기운이 어느새 주변을 서서히 잠식하고 있었다. 바다 안개는 수평선을 삼키고, 파도를 삼켰으며, 이어서 항구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마치 눈 안에서 무언가가 낀 듯, 시야가 흐려지며 풍경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마에 차가운 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어느새 부기와 함께 몰려다니던 포켓몬들은 곧 비가 올 거라는 걸 직감했는지 전부 볼에 들어가고, 앞에는 누가 빨리 돌아가자는 듯이 고개를 도시방향으로 까딱였다. 안개 너머에서 파도는 비가 오는 것에 맞춰 슬슬 거칠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과연 골목에 도착할때까지 비를 피하면서 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이내 후두둑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자 그저 파도에 휩쓸리지 않는 거리만 유지하자는 생각에 재빨리 항구를 떠났다.
이러니까 예전에 빗속에서 일할때가 생각나네- 그땐 진짜 몸도 축축하고 갑옷도 녹슬어서 짜증났었는데~ 후두둑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에서 용병시절 밥이라도 얻어먹겠다고 비오던 날에 도적들 본거지를 습격하던 때 이야기를 꺼내자 누는 그게 언제적 일이냐는 듯이 눈동자를 굴려 흘겨보았다. 아마 그때 거하게 미끄러져서 진창위를 굴렀던 일이 기억난 모양이었다.
분명 일기 예보에는 강우라는 말이 없었는데도 앞이 보이지 않을정도로 빗줄기가 전신을 세게 때리며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수천수만 줄기의 빗방울이 물안개와 뒤섞여 눈을 가리고 있었다. 이정도로 폭우가 내린다면 길에 다니는 이는 없었으니 그저 빗소리와 안개, 빗줄기만이 이 공백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흐릿하게 보이는 건물과 풍경에 의지하여 돌아가는 길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감정에 잠식되면 머릿속이 흐려진다지.
자극이 의사를 흐리게 만드는 감각을 충분히 잘 알고 있으니 아마 그 비슷한 것일테다. 하지만 언제나 그의 머릿속은 맑았고,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니 누군가는 이해못할 판단도 제 나름대로 사고체계를 거쳐 내린 결론이었다. 안개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이듯이, 상황과 감각이 사고를 압도할것처럼 닥쳐와도 제 의사만은 명확했다.
그러니 그는 무심했고, 무정했다.
다만 최근에 조금 거슬리는 것이, 집주인을 생각하면 머릿속에 안개가 끼듯이 미미하게 앞이 가려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오래된 기억 한구석에 처박힌 단명한 동생을 닮은 이였다. 제 하나를 너끈히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다른이에게 손을 뻗던 이.
덧없는 것을 닮았다. 상황에 솔직하게 반응하는 것도, 일순간 피고 져버릴 계절의 색을 띈 것도, 제가 감당하지 못할 정을 가진 것도. 아, 애초부터 그가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만 없었다면 진작에 흥미가 떨어졌으리라. 그 안일함이 역으로 자신을 붙잡아 둘 목줄이 되었다.
"....."
누군가는 덧없는 것, 옅은 것을 좋아한다지만 칼렌은 딱히 관심없는 쪽이었다. 연약한 것은 버틸 수 없다, 명확하지 못한 것은 인지하기가 어렵다. 그 모호함은 다른 말로하면 불안정함이었다. 그것이 미덕이자 아름다움이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속의 영역이었다. 현실의 선명함을 마주하는 순간 짓밟히고 추하게 사라지거나, 아니면 눈을 가리기 위한 연막으로 쓰였다.
냉정했지만 동시에 영리했던 인텔리레온은 거듭 경고했다.
- 약한 놈은 좋아하지 않잖아.
네 호기심때문에 집적거릴거면 목적을 이루든가, 아니면 손 떼지 그래.
네 관계라는 것은 그런거잖아.
관계라는 것은 모호하고 덧없는 것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도 않으면서 찔끔찔끔 쌓아야하니 이건 뭐 공기를 마시면서 배가 부르길 바라는 급이었다. 그러니 칼렌의 관계는 매우 직관적이고, 그리고' 현실'적이며 '감각'적이었으며, 동시에 '일시'적이었다. 몸으로 맺는 관계란 그런것이다.
-
무겁게 젖은 머리위로 보송한 수건이 덮이고, 가느다란 리본으로 잡아당기듯이 섬세한 손이 손목을 잡고 안으로 이끌었다. 우산이라도 덮고 오지 그랬어요, 아니면 센터에서 잠깐 비만 피하면 되는데. 무어라 더 얘기한 것 같았지만 딱히 상관없었다. 이미 소나기는 지나가고, 흠뻑 젖어버린 에몽가 꼴이 되었는데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러니 당장 중요한 것에 집중하면 되는 것이었다.
형, 듣고 있어요?
얼굴을 닦으라고 수건을 덮어줬는데도 미동이 없으니, 한참 궁시렁 거리다가 찡그린 얼굴로 이쪽을 보며 물었다. 듣고 있지 않았으니 대신에 웃음으로 답하자 닦아주려 했는지 손을 뻗어오는 것을 잡았다.
"..쫄딱 젖었잖아요. 그러다 감기 걸려요."
"이정도로 걸리진 않아."
"그렇게 자신있게 말하다가 걸리면 민망한 거 알죠?"
어찌나 천천히 왔는지 물에 푹 절어버린 앞머리에서 굵은 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흠뻑 젖은 모습을 굳이 유심히 볼 일이 없겠지만 이걸보고 눈 앞의 집주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조금 궁금했다. 그가 데리고 다니는 하얀 솜뭉치 마수도 비슷하게 축축하게 젖어있었다지.
물방울은 앞머리에서 이마를 타고, 그리고 눈꺼풀을 타고 뺨으로 계속 흐르고 있었다. 눈에 물이 들어가는 감각은 썩 좋지 않아 대강 훔쳐내자 한결 눈 앞이 밝았다. 흐린 봄빛을 닮은 이가 눈을 깜빡이며 잡힌 손을 보다가 나머지 자유로운 손으로 다른 수건을 집어 얼굴을 닦아주려고 내밀었다.
흐린것은 내키지 않는다.
덧없는 것도 싫다.
약한 것은 의미없다.
거기에 마음을 줘봤자 무언가를 하지도 못하고 손 안에서 사라지면 얼마나 허망한가. 칼렌은 그것이 제 손안에서 망가지더라도 손에 움켜쥐고 싶었다. 오히려 안에서 산산히 부서지면 조각날지언정 흩어져 사라지진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누 가 봤으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을것이다.
자신은 감정에 관심을 두지 않는거지 무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누군가는 이 간절함을 애정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통상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애초부터 알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정확하게 그릴까.
갈증이 나면 그걸 채울 뿐이었다. 뱃속에 불이 나면 그것을 꺼트리려 삼킬 뿐이었다.
"형?"
"음?"
"무슨 일 있어요? 그렇게 빤히 보기만 하고.."
"....앞이 안 보여서."
"당연하죠. 형 지금 쫄딱 젖은 거 알고 있어요? 처음에 봤을때 해초 뒤집어 쓴 줄 알았다고요."
"미안."
"말로만 미안하다고 하면 뭐해요.."
꿍얼거리면서도 착실하게 머리를 털어주며 말리는 손길을 느끼며, 칼렌은 천천히 눈을 감고 버릇처럼 웃었다.
그리 흐릿하게 있으면서도 손을 내밀어 선명하게 제가 여기있음을 알려준다.
감정을 줘서 흡사 손에 잡힐 거라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갈팡질팡하면서도 굳건히 버티고 서서 뿌리내렸다는 모습을 보여준다.
봄의 색을 띈 다정한 이는 약한듯하면서도 끈질긴 것이었다. 정을 주고, 감정을 드러내며, 강하게 나서지 못하면서도 자신은 강하지 않지만 약해지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리시, 네가 그렇게 당당하게 버티려고 하니까 넘어트리고 싶잖아.
약한 주제에, 약해지지 않겠다고 하니까 잡고 싶어지잖아.
어떻게든 사라지지 않으려고 하니까 손 안에 두고 싶어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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