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랑의 환상은 끝났지만 탑의 출구로 향하는 걸음은 무겁기 그지 없었다. 작전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곳에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존재하지 않으나, 탑의 구조는 그대로인지라 익숙한 모습의 계단, 벽, 기둥 사이로 기억에 새겨진 환상의 모습이 얼룩과 미세한 흠집처럼 언뜻언뜻 보였다. 정확하겐 환각이 아니라 여운에 가까운 것이었다.
"혹시 성묘를 하고 가도 될까요?"
"네, 따로 찾는 분이 계신가요?"
"아뇨. 아는 사람이 있는지 보려고요."
재의 날은 한순간에 꽃의 군락을 불태웠고, 달의 사당은 재가 되어버린 숱한 기억이 새겨진 묘지가 되었으나 그 잿가루 같이 맵게 흩날리는 죽음 중에서 자신이 기릴 것은 없었다. 플로레 지방에 적을 두었으나 거의 반절 가까운 시간동안 떠나있어 회랑에 길게 드리운 그림자의 무게를 온전히 느낄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낯선 묘비의 숲을 거니는 것은 고향에 새겨진 상흔이 생각보다 깊고, 까맣고, 숨막히는 탄내가 풍기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재구성된 기억속에서 계단과 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이들이 영 눈 안에서 지워지지 않았다는 이유일 수도 있고.
알 수 없는 이름과 비석 위에 간간히 놓인 꽃다발과 잡동사니들을 보았다. 어떤 것은 꽤나 자주 찾는 이가 있는지 아직 시들지 않은 꽃잎과 다양한 소품이 널부러져 있었고, 어떤 것은 꽃다발이 진작에 말라있었고, 어떤 것은 아무것도 없이 먼지만 하얗게 쌓여 있기도 했다.
"음? 이쪽에는 이름 없는 비석이 많네요."
조금 구석진 곳에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는 비석들이 가득 세워져 있었다. 간간히 글자가 새겨진 것이 있었으나, 이름/생년월일/성별 등 신원을 특정할 만한 정보만이 적혀있었다.
"아, 이쪽은 재의 날에 수습된 피해자 중에서 신원을 알 수 없거나 따로 유족이 없던 사람들을 거둔 곳입니다."
"그렇구나... 아예 찾는 사람이 없을까요?"
"종종 참배객 중에서 이름을 찾는 분들은 있지만...아무래도 아예 이름을 모르면 찾을 수 없지요."
그래도 누군가는 끈질기게 기록을 좇아 기어코 잃어버린 이를 찾았는지, 글자가 적힌 비석 중에서 2-3개 정도는 작은 꽃다발이나 늘 지니고 다닌 듯한 악세사리 등이 놓여 있었다. 혹시나, 아주 만약에 제가 기억하던 옛 이웃의 이름이라도 있을까 싶어 묘비의 이름을 더듬던 중, 익숙한 글자의 배열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 ■ ■ ■ ■ ■ ■/ 19 ■ ■. ■ ■. ■ ■/ M / ■ ■ ■ 타운]
"......"
정신을 차렸을 때는 무릎을 꿇고 앉아 혹시나 잘못 읽었을까, 손가락으로 글자를 더듬고 있었다. 빈말로도 서로의 이름이나 인적사항을 기억해줄 사이는 아니었으나, 어떤 관계는 오히려 지독하게 증오로 얽혀있어 선명하게 서로를 기억하기도 했다. 이름, ■ ■년생의 이터널타운 출신의 사내. 머리 한구석에서는 그저 우연히 몇가지가 맞는 타인일수도 있다 막고 있으나, 심장은 무겁게 가라앉으며 머릿속에 무언가가 터지듯이 눈 앞이 반짝였다.
마치 그 사람에게 배운 것을 돌려줬을 때처럼.
"...하..."
자신에게 겨울을 심어주고 사랑하는 가족에게 영원히 남을 상처를 안겼던 '가족'이 영영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재의 날이 그를 삼켰다.
끝을 실감하자 새어나온 숨은 한숨이었을까, 웃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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