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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테일_틸

[7] 보내지 않을 어떤 편지

by 배추쿵야 2025. 12. 1.

아빠 안녕! 잘 지내고 있어요? 술은 적당히 드시는거죠? 저 사장님한테 부탁했으니까 나중에 물어볼거에요. 진짜라고요. 

저번에 우리 길드에서 큰 일을 한다고 했잖아요? 어디까지 얘기해야 '프로 길드원'이라 해야할지 몰라서 적당히 백작님의 신부를 맞으러 간다 했었죠. 그때는 이래저래 주변에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어서 그게 더 걱정이 되었지만....

 

음- 원정은 어떻게 되었냐면요. 된통 꼬여버렸어요.

평생 보기 힘든 대륙의 마법사님들을 보고, 블룸라이즈를 위협한 혈룡도 물러나게 하고, 레인바인 계곡에서 오염이 범람해버려서 우화한 이무기도 제압하느라 정작 다른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걸 본 데다 기사님들과 영영 헤어져야 했지 뭐에요? 얼핏 들으면 이게 일하러 간 건지, 아니면 대륙의 골칫거리를 해결한 영웅담인지 알 수 없겠지만.....

다시 한번 말할게요. 우리 길드가 받은 의뢰는 '백작님의 신부를 맞이하는 기사님들을 호위' 하는 일이었어요. 그나마 시올 신관님이 살아남았지만... 그것도 아마 가족이었던 웜텟 기사님의 희생이 아니었으면.... 음, 뭐 그래요. 

 

아빠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들어줄 거라는 걸 알아요. 아마 이 편지가 전해진다고 가정하면, 아빠는 내가 앞으로 할 얘기중에서 가장 믿기 힘든 사실을 들을지도 모르겠네요.

지긋지긋한 폭풍우가 지나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다리오 경을 구하고 싶다는 동료의 의지를 지지한 결과 임무가 거하게 실패한 순간에 민들레 꽃이 한 송이 피었어요. 태양신님의 선택과 함께요. 아빠가 그랬잖아요. 태양신이 선택한 마법사들은 영웅의 운명을 지게 된다고... 물론, 우리가 마법사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그래요 아빠. 단델리온 길드는 영웅으로 선택받았어요. 우리가 막연히 기대한 흐름이 크게 어긋나고, 커다란 상실을 겪고, 선택의 무게에 버거워하던 순간에요. 

 

누군가는 한 국가가 박살날 커다란 위험을 막은 것인데 그깟 일 따위가 대수냐고 할 지 모르겠지만... 글쎄요, 그 선택은 찬란한 영광이라기 보단 짓누르는 운명 같아서 아주, 매우 답답했어요. 사실 원정을 시작했을때 이 일이 끝나고 보수를 받으면 뭘할까 내심 기대하는게 전부였는데요.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이랬는데, 난 집이 필요없으니까 여차하면 아빠한테 nnn년산 빈티지 와인이라도 사드릴까 계획하고 있었다고요. - 그리고 와인은 못 드릴거같아요, 미안!- 

 

 

이 편지는 창백한 산의 유리성에서 적고 있어요.

내가 맨날 유리성에 가고 싶다고 했잖아요. 아무도 찾지 못한 성역이기도 했고, 만약 소문에 뭐든 고쳐주는 마법사님이 있다면 아빠가 잃었던 모습을 되찾을 기회를 주고 싶다고.... 어쩌다보니 첫 원정에 여기까지 와버렸네요. 유리성은..평범하게 화려한 성이에요. 아름답고, 따뜻하고, 마법사님은 일단 친절하고, 시그드리파는 귀엽고, 기드온들은 이것저것 부탁하면 잘 도와줘요. 여행 내내 어렴풋이 이야기 듣던 유리성에 갇힌 '공주님'도 만났어요. 맞이해야 할 신부님이 계신 곳도 알았고요. 엄청 돌고 돌아서 난장판이 되었지만 일단 원정의 끝이 보이긴 하네요.

 

 

 

 

아빠, 단델리온 길드는 지금 대재앙을 눈 앞에 두고 있어요. 

반세기 전 어떤 예언이 있었고, 그 예언이 실행되기 직전에 닿았어요. 

우리의 노력으로 숨겨진 성의 열쇠를 받아 성문을 열었고,

성에 갇힌 공주님은 무사히 반쪽을 만났고, 그 공주님의 힘이 있으면 무서운 용도, 온 대륙을 물들일 오염도 사라지고 모두가 손쉽게 행복해질 수 있어요.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세상의 멸망을 막아낸 영웅이라 칭송받겠죠. 우리와 함께했던 공주님의 반쪽을 돌려주게 되면요.

 

아빠, 아빠가 말해준 이야기 속의 못된 네레이드는 바다에서도, 뭍에서도 늘 쉬운 방법과 어려운 선택 중 어려운 선택을 해왔어요.

그 어려운 선택은 고향을 잃게 만들고, 요정의 발목을 잡고 계속 구르게 하다가 끝내는 옛 모습을 잃게 만들었었죠.

아빠는 늘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렇게 넘어지면서 만들어진 상처가 없던 것이 되는게 아닌 걸 알고 있어요.

 

고향을 그리워하진 않으나 해변에서 하염없이 파도를 바라보던 숨을 기억해요. 

선택이 만들어낸 실패가 조롱이 되어 싸우게 되던 모습을 기억해요.

달도 별도 없는 밤에 식탁에서 짙게 풍기던 포도주의 향기 섞인 한숨을 기억해요.

 

 

그래도 아빠, 제 세상은 겨울바람과 물거품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춥고 시린 겨울이 닥치고, 쉬운 길과 어려운 선택 앞에서 후회하지 않으려 겨울을 뚫고 갈 못된 윈드워커가 될 걸 알고 있어요. 

설령 이게 운명이 밀고 밀려서 마주하게 된 것이라도. 

 

 

 

당신들이 그러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