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성 내부에는 갖가지 엘릭시르가 심어진 정원이 자리했다. 이곳에서 잠들고, 뛰노는 시그드리파의 말에 의하면 '메리의 정원'이라고 하는데, 세포 하나하나를 베는 듯한 칼바람이 불어오는 성 밖이나 한겨울의 벽난로 앞처럼 온화하고 묵직한 따스함을 지닌 성 내부와는 또다르게 아늑했다...그리고 정원에 융단처럼 얕게 깔린 잔디 위에서 녹색의 윈드워커와 또 하나의 하얀 드래곤은 나란히 단델리온의 시그니쳐 자세 - 물론 길드원들의 승인은 받지 않았다-로 방탕하게 누워있었다.
"이 자세, 무슨 의미가 있는거야?"
그저 어딘가 평화로운 언덕에서 님과 함께 이사가서 살고 싶은 사람마냥 두 팔로 머리를 받치고 벌러덩 드러누워있으면 편할텐데, 이 고릴라 인형 자세는 상반신은 바닥에 챡 붙어 방탕하게 누웠으나 두 다리를 접어 꽈배기마냥 꼬아버려야 하는지라 관절과 척추건강에 좋은 자세라 할 순 없었다.
그래도 몸은 자기 척추와 뼈를 뒤틀리게 하는 자세를 선호하는 법. 좋지 않다고 정확하게 짚으면서도 착실하게 자세를 따라하는 하얀 해츨링이었다. 어린 윈드워커는 고개를 돌려 이를 바라보다, 다시 천장으로 눈을 돌렸다.
"이렇게 누워있다보면 뭔가 근심걱정이 뒤로 미뤄지는 기분이야. 피곤하거나~할 일이 없거나~ 아니면 생각이 많아지거나 우울해도 어느정도 정리가 되거든."
"......"
시그드리파. 계절서 한구석에 은밀하게 적혀있던 서명, 바이올렛의 반쪽, 완성되지 못한 여덟번째 마법사, 유리성의 기적을 부르는 소서리스, 용사를 기다리던 공주님. 어떠한 운명을 타고난 이 마법사에게 붙는 것들은 하나같이 무거운 이야기뿐이었으나, 쇠오리는 예전에 어떤 프네우마에서 들리던 작고 여린 속삭임을 먼저 생각했다. 아주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다던 작은 목소리를.
조금 많이 다른 방향이었지만, 오랫동안 고립되어 세상을 떠돌던 겨울바람과 함께하던 여름바람을 인류에 포함되도록 만든 것은 무리에 속해서 많이 보고 들은 것도 있었으나, 두번째 보호자가 들려준 이야기 또한 적잖게 그 비어있던 바람을 채워줄 수 있었다. 돌아가지 못한 옛 네레이드는 변해버린 뒤에도 터무니 없는 수다쟁이에, 제 멋대로 이야기를 뜯어 고치는 각색꾼에, 조절없이 나불거리는 이야기꾼이었다. 그러니 그녀에게 교류를 배운 어린 바람 역시 이야기를 끊임없이 갈망하는 유리성의 해츨링에게 조각보마냥 갖가지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길드원들의 방탕하고 괴상한 시그니쳐 포즈, 소울링크와 그에 따른 사랑이야기, 수명의 이야기, 같은 조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전투에 나서던 순간, 룸메이트였던 라샤와 방을 함께 쓰면서 있었던 일, 다른 방의 유페니아에게 초대받아 티타임을 가졌던 일, 같은 바람인 세레나드, 엘레나와 나섰던 산책의 순간, 함께 공중을 노니는 것을 좋아하던 소후와의 공중산책, 엘릭시르나 식재료를 찾기 위해 온 구역을 뒤졌던 순간, 명수와의 첫만남, 경계너머의 색다른 꿈 이야기, 이제는 영영 헤어진 기사들과의 이야기...등등... 색깔도, 재질도 다른 수개의 조각을 꿰매고 붙여 커다란 보자기를 만들듯, 이 수다쟁이 바람은 이야기를 원하던 해츨링에게 그것을 꿰어 건네주었다.
"시그드리파."
하얀 소녀의 뺨을 아프지 않게 집었다. 표정이 없는만큼 쓰이지 않은 뺨은 근육이 붙지 않아 말랑거렸다. 시그드리파는 이게 무슨 의미인지 가늠하듯 여전히 표정없이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를 계속 기억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기대했던 용사님이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
짧게는 몇개월, 길게는 몇년을 함께하던 동료가 이 소녀의 반쪽이었고 언젠간 사라져야 한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비록 반쪽이 경험한 기억을 활자와 이야기로 이루어진 형태로 접했으나, 이 소녀가 이야기를 들으며 제 세계를 차근차근 자아내고 기대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야기의 힘은 그런것이니까. 그리고 놀랍도록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둥과 열쇠, 그리고 몸에 꼭 맞도록 자아낸 스웨터는 그녀가 비록 직접 함께하지 못했으나 '용사'들을 끊임없이 기다리고 몇번이고 곱씹었다는 의미기도 했다.
"하지만 말이지...우리가..아니, 적어도 내가 당황했던 것은 함께했던 사람이 '바이올렛'이라 그런거야."
"....."
온전히 이해하진 못했으나 이 영리하고 뛰어난 마법사는 적어도 길드원들이 둘을 별개로 보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길드원들도 이야기와 생각 끝에 이 둘이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도 알게 되었을테고.
"...시그드리파도 언젠간 시그드리파만의 용사님들을 만날 수 있을거야.
활자와 이야기가 아니라, 시그드리파가 직접 느끼고 기억을 함께하는 사람들."
이야기의 힘은 위대하나, 그 근간은 크든 작든 어딘가에 실존하는 '경험'에 있었다. 직접 대화를 나누고, 온기를 나누고, 순간을 나누던 기억들은 선명하게 살아움직이며 강력한 힘이 될 수 있었다. 다만, 이 얘기는 어찌보면 유리성에 홀로 남아있을 그녀에겐 거짓된 위안으로 들릴지도 몰랐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끌어당긴댔어.
어쩌면 시그드리파도 이곳에서 용사님들과 함께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이야기를 끊임없이 곱씹고 기억하고 소중히 하는 이라면 마땅히 그 이야기를 적어 낼 힘이, 자격이 있을테다. 그가 자아내는 이야기는 분명 더 아름답고 선명하겠지.
"나중에~ 시그드리파가 그런 순간을 겪으면 그땐 시그드리파의 얘기를 들려줘."
공백포 2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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