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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블룸_리크

Report 8.

배추쿵야 2024. 4. 25. 00:49

 

(*주의: 흡연 및 폭력, 그룹 내 따돌림을  암시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리크 비리디언은 어느날 아침, 기상알람을 듣고 눈을 떴다. 마치 잠을 자다 정신이 깨어나듯- 어차피 잠에서 꺤 거니 맞지만- 또렷하게 한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때려치자' 라는 문장의 형태로 말이다. 

 

 

물론 세상에서 남의 돈 먹기가 힘들고, 어른이 되면 다 자기만의 마음속 칼춤이든 인파이트든 대폭발이든 최종병기를 숨기며 사회속에 부지런히 녹아 들어간다지만 그걸 진짜 드러내는 인간들은 보통 소소하게는 사회에서 소외된다. 누군가의 상상 속에서는 호쾌하게 꼴보기 싫은 놈을 후려친 뒤 " 내가 꼴보기 싫어서 말이지! 늘 괴롭히던 상사놈 뚝배기를 깨진 포트로 만들어 버렸지 뭐야, 하하! " 라고, 뒷 일은 생각하지 않는 어딘가의 구닥다리 기사문학의 조연마냥 구는 장면이 있겠지만 '사람을 함부로 때리면 안된다' 는 대전제는 비록 세세한 사정을 봐주지 않아도 나름대로 굳건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요약하자면 포트를 깬 뒤에 뒷감당을 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라는 말이었다. 

인생 버킷리스트 중에 '이름에 빨간 줄 그이기' 가 있다면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있겠지만.

 

 

 

참고로 여기는 부대였다. 그것도 이 세계를 총괄하는 전국 포켓몬 연합 휘하에 소속된 공적이고 특수한 목적을 위한 무력집단. 농담으로라도 -다 뒤집어 엎고 때려칩니다, 도망갑니다, 꼴보기 싫은 놈을 '이빠진 포트'로 만듭니다. - 같은 소리를 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울분을 풀기 위해 말로 내뱉는 것과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말로 내뱉는 것은 와닿는 무게가 다른 법이었다. 

 

애초부터 그 정도로 무법자에 독고다이 반사회적 성향이 있는 인간은 여기 접근하기도 힘들겠지만, 어디든 다양하게 사람의 신경을 긁고 정신건강을 벌레먹기마냥 갉아대는 부류는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지금 리크의 정신상태는..매우 명정했다. 어차피 다 갉아먹힌 이파리 너머의 시야도 맑은 것처럼 말이다.

 

다만 벌레가 먹기 귀찮아서 잎맥을 남겨놓은 것마냥, 아주 희미한 이성이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성은 마지막 경종을 울리듯 외쳤다. '때려치자' 라고 말이다. 정확하게 풀어서 말하자면 '진짜로 자기가 화병에 미쳐서 살아있는 인간에게 테러를 가하기 전에 때려치자'에 가까웠다. 

 

하나하나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트레이너 시절 실적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동기놈이 견제한다든가, 그놈이 자신보다는 뒷배경이 있어서 시비를 걸어도 뭐라하기 애매했다거나, 이게 진지하게 상부에 보고할 만큼 심각한 괴롭힘도 아니었다. 애초부터 자신이 복종하는 것은 상부였고, 지휘 체계와 이곳의 시스템이었다. 돈을 주는 쪽이 여기였으니까.

 

몇몇 비슷한 나잇대의 상사들이나 선배들이 포지션에 대한 아주 구식의 편견을 늘어놓는다든지, 자신의 노력을 별 거 아닌 것으로 취급한다든지, 적당히 놀고 먹는 기생식물 취급한다든지..같은 건 너무 의도가 뻔히 보이고 유치해서 대꾸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가끔 일할 때 뒷통수 조심하라고 '농담'을 하면 적당히 닥쳤지만, 이미 그들이 어떤식으로 뭉쳤는지, 그 사이에서 저들만의 의견을 주고받으며 되도않은 전우애를 다지는 것이 보였다. 

 

 

가을에 온 산이 덮이도록 낙엽이 쌓이는 것처럼, 그 사소한 시비와 시선, 배척이 하나씩 쌓이고 있었다. 그것들을 어디론가 날려버리지도 못하여 묵묵히 걸음을 옮겼지만, 그것들이 귀찮게 달라붙어 발걸음이 무거웠다. 조금이라도 태울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연기를 마셔보기도 했지만 오히려 가슴 한구석에서 옹송그린 무언가가 매캐하게 타는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때려치자."

 

차라리 신경줄을 갉아먹는 인간들과 자신을 둘러싼 은근한 압박과 싸우는 것은 견딜만했다. 재수없고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삶의 소소한 고난이자 월급과 바꿔먹는 노동이라 생각하면 편했다. 오히려 견디기 힘든 것은, 오래전 묻어두었던 것이 타는 냄새를 풍기기 시작할때부터였다. 생각하니 자기 인생은 왜 이렇게 되도 않은 놈들이 흔들어 제끼나. 싶은 생각에 울컥했는데, 그게 좀 이번엔 쎄게 온 것 같았다. 

 

태워버리자, 다 태워버리자. 풀 한포기 제대로 자라지 않은 이 황량한 공터처럼. 그 지워지지 않는 냄새가 몇 번이고 속삭였다. 오래전부터 차곡차곡 잘라내었다 생각한 무언가가 계속 타오르며 속삭였다. 그리고 리크는 그것들의 소리에 홀라당 넘어가서 거슬리는 놈들을 '이빠진 포트'꼴로 만들거나 '먹다남은 음식'꼴로 만들거나, 아니면 자체적인 '대폭발'을 쓸 정도로 궁지에 몰린 건 아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리크 비리디언은 잘라내는 것을 아주 잘했다.

그날 무언가를 포기하기로 결심한 이후로 그 마음은 갉아먹히거나 지나치게 잘라 앙상하게 될 지언정, 부질없는 것에 매달려 썩어갈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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