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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9.

배추쿵야 2024. 5. 2. 17:08

 

가장 최악의 기억을 요약하라면 [집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아버지가 편지 한 장 남기고 야반도주한 썰 푼다 ] 라고 할 수 있었다. 워낙 서로 없는 취급하던 가족이었는지라 사실 이제 슬슬 옆집의 그 성격 나쁘고 귀찮게 굴지만 이것저것 관심 가져주는 할망구가 차라리 자기 가족이 아닐까~ 하는 달콤쌉쌀한 망상을 잠깐이나마 했었지만, 이런식으로 '가족'이라는 걸 절감할 줄은 그때도 예상하지 못했고,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편지 내용만 생각하면 한동안 울화가 치밀어 올라서 대강 흐리게 내용을 지웠지만 대략 수십가지의 변명과 자기 연민으로 범벅이 되고 결론적으로 가디판을 쳐놓은 뒤 훗날을 기약하며 '잠시 후퇴' 를 한다는 정신 승리로 끝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미안하다는 말이라든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언급은 한 줄 있었다. 곧 있으면 채권자들이 찾으러 올 테니 잠시 피해있거나, 혹시라도 만나면 아빠 없다고 하라고 했던가. 너무 대단하고 획기적인 마지막 조언이라 잠시 그 채권자들 대신 이 인간을 찾아서 저 멀리 어선으로 보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고로 쫓기는 입장에선 최대한 흔적을 지우는게 답이라고 했지만, 흔적이고 나발이고 사실 쫓기는 중이었는지 집안꼴을 폭탄 맞은 것처럼 해놓고 편지 한 장 달랑 쓰고 튀었다. 그나마 노트를 대충 뜯어 쓴 이 한 장짜리 편지에 담긴 한 줄 짜리 '충고'가 그 놈의 양심의 크기였나보다.

 

"....."

 

어떤 분노가 임계치를 넘으면 오히려 차분해진다고 했던가, 무력해진다고 했던가. 이 노트 낱장을 구겨서 찢을 의욕도 없이 힘이 쭉 빠졌다. 감정은 더없이 잠잠했지만 그 속에서 일렁이는 것은 더없이 불쾌하고 불길한 무언가라, 그 감정에서 도피하듯이 차분하게 짐을 챙겼다.

 

당장 급한 옷가지와 잘 숨겨둔 저금통의 용돈을 챙긴 뒤, 혹시나 들킬까봐 창밖으로 사람들이 없는 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가장 외진길이 있는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빠져나갔다. 문득 장미가 핀 옆집의 울타리가 보여 걸음을 멈췄지만, 인사할 시간이 없었다. 갑자기 여행을 떠난다고 하면 그 할망구는 꼬치꼬치 물을거고,이런 기분으로 그 잔소리를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부터 지금의 자신은 여러모로 엮이면 골치 아픈 존재였고, 누군가에게 의지할 상황도 아니었다. 그게 조용히 정원을 가꾸며 평화롭게 살던 누군가의 일상을 흔드는거라면 더더욱 끔찍했다. 

 

"르클레르."

 

일단 멀리 도망치자. 

 

"가자."

 

아이가 마을을 떠나 '순례여행'을 하는 것은 흔한 일이니까.

 

 

 

 

 

 

 

 

 

 

.

.

.

.

 

찾아간 오피스텔의 거실은 조금 좁은 사무실 같았다. 볕 잘드는 곳에 놓인 커다란 책장 달린 책상과, 책장에는 딱봐도 벽돌처럼 두껍고 무거운 책들이며, 오래된 종이를 모아놓은 파일철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약속 시간이 될 때까지도 일을 하고 있었는지, 책상 위에 있는 노트북 화면에는 뭔가 한번에 알아보기 힘든 글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 은퇴한 지 오래되었다지만, 이런 일은 은근히 자잘한 부탁이나 잡일이 자주 들어와요- 집주인인 늙은 변호사는 그리 말하며 책상위에 어지러이 널려있는 종이들을 정리해 한쪽으로 밀어두었다. 

 

아이고- 손님을 받은진 오래되서, 차가 영 없네. 보리차로 괜찮겠어요? 옥수수 수염차라든지? 어쩐다, 이거 티백만 달랑 담궈서 대접하게 생겼네. / 아뇨, 제가 찾아오는 쪽인데 다과쯤은 가져와야죠. 다행히도 우르술라 스트리트에는 각양각색의 티푸드 점도 많았던지라, 방문 선물로 무난하게 먹기 좋은 후르츠 롤케익을 가져갈 수 있었다. 간만에 찾아온 손님을 맞겠다고 부산스레 움직이려는 이를 도와 접시에 티포트, 찻잔을 깔고 포크를 하나씩 놓으니 작은 다과상이 하나 차려졌다.

 

"서류는 여기있습니다~ 카멜리아가 쫙 정리해놓고 갔죠. 아마 신고만 하시면 바로 등록되실거에요.

하이고, 그 말라비틀어진 공터가 이제야 주인을 찾네."

 

반쪽짜리 유언장으로 그렇게나 사람 속 터지게 하고, 꼭 이 여정의 끝에 뭔가 대단한 것이 있는 것마냥 보였지만 실상 내용에는 어떠한 반전도 없었다. 그저 형식에 맞춰 사라시티 nn번지의 부지와 집을 상속하겠다는 내용과, 본인 및 변호사의 공증을 받았다는 서류, 그리고 그 부동산의 소유주를 증명하는 몇가지 서류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그...카멜리아씨가 남긴 건 이것뿐일까요?"

 

그렇게 장문의 편지를 남겨놔서 여기까지 찾아오게 만들어놓고 달랑 법적인 서류만 남긴 것이 매정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 할망구라면 욕을 퍼부은 다음에 슬쩍 중요한 용건을 턱 건네주고 홱 돌아서서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가고도 남았다. 애초부터 차 떼고 포 떼고 제일 핵심은 유증이었으니. 필요한 걸 주지만 정작 내밀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하던 괴팍한 노인, 그것이 카멜리아라는 사람이었다. 생각보다 닫힌 마음의 문은 굳건해서, 어쩌면 일말의 따스함이 있었다 하더라도 죽는 순간까지 그걸 드러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시작도 끝도,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은 그리 유쾌하지 않은 침입자였다. 그러니 가끔 옛 기억을 회상하더라도 화가 나는 건 화가 나는 것이었다.

 

기대하지 않고 던진 질문에, 상대의 표정이 웃음을 참듯 일그러지더니 미처 참지 못한 바람빠진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 그러고보니 '하편'이 있었죠. 상편 쓰는 내내 걔가 씩씩대면서 엄청 휘갈겼어요. 골골대다가도 편지만 쓰면 쌩쌩해지니 주기적으로 욕하는 편지를 써라고 권했다가 혼났다니까요? 하편은 내가 죽어도 보관해놓다가 그 꼬맹이가 오면 면전에 던져주라고 하던데. '상편'은 어땠어요?"

"안 그래도 받자마자 잔소리가 재생되는 기분이더라고요."

"걔가 그렇죠 뭐."

 

 

아....무슨 연재 소설도 아니고. 

그 푸념과 원망과 성질내기가 섞인 글에 '상편/하편'같은 넘버링을 대체 왜 붙였을까. 웨이브타운에서 스텔라시티까지 꾸역꾸역 오게 만든 뒤 시간차로 갈구고 싶어하는 것이라면 그녀에게 딱 맞는 방식이라 생각했다. 상대는 느릿한 걸음으로 거실 구석에 있는 금고를 열더니, 편지가 들어간 얇은 연분홍색 봉투를 가지고 돌아왔다.

 

 

"4년전이었죠. 그때는 저쪽에 꽃밭도 간간히 보였었는데."

 

3년 전, 플로레지방을 휩쓴 '재의날'은, 이곳에 사는 사람 모두에게 크든 작든  상처와 그을음을 남겼다. 그때를 회상하는 이의 눈빛이 일순간이나마 깊게 가라앉았다. 

 

"카멜리아가 4년전에 멀리 가버려서 다행이에요.

여기가 통째로 날아가는 걸 봤으면 아마 그것때문에 화병으로 죽었을거야."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는 재의 날 이전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본래 묘지는 메테오시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잠드는 탑에 썼지만, 사람 많아서 복작복작한 건 싫다고 하여 조금 떨어진 곳에 작은 땅을 사서 개척 사업을 벌이던 곳에 묘지를 만들어놨다고 했다. 

 

"당신 얘기를 많이했어요."

"욕이 아니고요?"

"걔가 원래 좀 그렇잖아요. 새삼스럽겠지만, 좀 이해해줘요. 사람을 싫어하는 녀석이라. 그래서 그 타지에서 친구가 생겼다고 했을 땐 놀랐죠."

 

 

그 괴팍한 정원사가 사람을 썩 좋아하지 않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 원인이 선천적인 성향때문인지, 아니면 알 수 없지만 그녀가 그 세월동안 겪었던 수많은 일들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고향에 돌아온 뒤에도 딱히 달라지진 않았다고 했다. 

-칼로스에 처박혀서 살 것처럼 굴더니, 6년전인가? 7년전에 돌아왔어요. 원래 폭슬라이도 죽을 때는 고향쪽으로 머리를 둔다잖아요. 근데 왜 왔냐고 물어보니까, 거기서 기다리는게 지긋지긋하고  슬슬 한계라고만 했죠. 누굴 기다렸나 했는데....- 

 

그는 더 말하지 않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 기다리는 '사람'을 굳이 더 말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겠지만, 어쩐지 그 시선이 못처럼 콱 박혀오는 기분에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눈이 마주치면 머릿속에 떠도는 수많은 케케묵은 감정들이 거울마냥 비춰질까봐.

 

"걔가 왜 당신을 신경썼는지 알겠네요.....엄청 닮았어요."

 

"그 사람이랑 제가요? 취향이나 성격이 완전 다르다고요."

 

"아니요, 닮았어요. 걔도 세상을 싫어했거든요. ...근데 계속 세상을 좋아하려는 이유를 찾았어요."

 

 

 

공백포 3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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