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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블룸_리크

[진화] 니로우 > 돈크로우

by 배추쿵야 2024. 5. 8.

지나친 자기 검열은 자기자신을 위한 목줄을 정성스레 매어놓는 짓이라 하지만, 그것 못잖게 자기 성찰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이를테면 - 나 정도면 양반이지- 같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스스로 올라오면 재빠르게 답안지를 검토하듯이 가볍게 성찰해 보는 것이 옳다. 혹여나 성찰이 검열로 빠질 때면 제3자의 시선을 빌리는 것도 좋고. 
 
다만 진지하게 별거 아니라 생각하는 분야에서 [ 나 정도면 양반이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특유의 아집과 착각에 빠져 있을 확률이 높으므로 누군가에게 묻거나 그 대상이 항의하지 않는 이상 성찰은 어려운 일이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현재 이 트레이너의 옛 파트너- 헤라크로스를 맡은 선배가 있는데, 그 선배가 자신의 시비꼬를 '전서구' 라고 소개했을 때, 자신을 비롯한 후배들/부하들은 네이밍 센스 참 물질적이라고 생각했었다. 암만봐도 '넌 배틀은 모르겠고 유사시에 뭔갈 배달하는데 부려먹겠다' 는 의지가 낭낭하지 않은가? 실제로 그 선배의 시비꼬는 열심히 뭔가를 배달했었고, 배달을 잘 하면 그에 따른 보수(먹이)도 잘 주었다. 

시비꼬 중에서도 제법 거칠게 살아온 퐈이터 옐로 페더였던 그 녀석이 한낱 전서구로 전락하는 것을 보며 길들여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10초정도 개똥철학적인 고찰을 했었던 기억이 있다.


혹자는 그런 비판적 사고를 가진 채 콩알뚜기 이름을 다우징이라 짓냐 반박하겠지만, 다우징은 더듬이가 그렇게 생겨서 그렇지 자신은 다우징이 어릴때 물건 찾아라고 부려먹은 적이 절대로, 없었으니 그런 의도는 아니라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너무나 다면적이고, 또한 살아가면서 어떤 선택지 앞에서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는 경우도 많은지라 생각지도 못한 선택을 할 때도 있었다. 요약하자면 '내가 하면 전략, 남이하면 티배깅/트롤/비매너' 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선배 네이밍 센스 완전 구려요 포켓몬을 그렇게 쓴답니까? 라고 생각하던 후배는 니로우 한마리를 잡으면서 태연하게 '배달 좀 하자' 소리를 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영리한 새는 할 수 있는 게 많았다.

 

 

 



"넌 진짜 그 속도가 너무 아깝다. 날개가 너무 커서 그런가?"
- ......

전서구 2호. 니로우 까막이는 제 트레이너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물론 왠 인간이 잡아놓고 '너 나랑 일 좀 같이 하자' 이랬을 땐 니로우 쫀심이 있지 어떻게 니가 시키는대로 고분고분하냐고 좀 뻗대긴 했지만, 이 트레이너는 상냥하게 보듬어 주는 것 보다는 보스 돈크로우의 방식을 더 편하게 여기는 것 같았고, 실제로 진짜 돈크로우한테도 당하지 못한 고초를 겪어버렸다.

그나마 별 거 없으면서 윽박질렀으면 골탕이라도 먹였겠건만, 나름 착실하게 굴려가면서 부려먹는 당근과 채찍은 너무나 익숙한 '보스의 방식' 이었는지라 딱히 반항하거나 도망칠 이유도 없었다. 까막이는 자유를 갈망하며 이 한몸을 불사르는 폭풍같은 삶보다는 적당한 숙식 제공이 되는 길들임을 선호했다. 일명 보신주의에 특화된 머리라는 의미였다.


"슬슬 진화할 때가 됐을텐데, 이번엔 네가 좀 나서줘야겠다."
몇가지 수심호와 소리를 익힐 무렵, 트레이너는 가방 깊숙이 숨겨두었던 정체불명의 돌을 꺼냈다. 그림자처럼 새카만 색이지만 햇빛이 쏟아지자 일순간 까만 돌에 층이 생기듯이 은은한 보라색이 돌기 시작했다.

아주 멋진 반짝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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