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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블룸_리크

[시점변경] 무언가의 초고에서 이어지는 조각글

by 배추쿵야 2024. 10. 7.

시점변경

 

 

 

 

 

늦은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마치 종이에 물이 번지는 것처럼 밤이 깊어지며 어둠과 함께 한기가 여관 전체로 번지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백아 녀석이 반쯤 열려있던 문을 옆으로 밀어버리며 들어왔다. - 한밤중에 시끄럽다, 백아. - 그리 말하니 세모낳게 눈을 뜨고 미간을 찡그리는 것이 어지간히 짜증난 모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예의없이 무슨 짓이냐 한소리했겠지만, 아까 봉변당하던 걸 생각하면 한번쯤은 참아주는 것이 도리였다.

 

"....형님, 대체 무슨 짓을 한거에요?"

 

 

음, 그냥 사소한 실수가 있었지.

여기 걸린 술법을 잘라내는 과정에서 하필이면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에 객이 묵고 있었을 줄은. 물론 이런 험한 일에 시비가 걸리는 건 드물지 않았지만, 저 녀석의 혓바닥이나 눈속임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분노한 상대는 또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몸을 쓰는 직업인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멱살을 단단히 틀어잡고 끌어당기는 것이 제법 제압이 익숙해 보이기도 했고.

 

"실수치곤 단단히 잘못 걸렸어요. 찾아보겠다고 말하고 풀려났다고요."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녀석이 한숨을 짧게 쉬며 어느쪽을 흘끔 보았다. 시선이 닿는 곳을 보니 조금 떨어진 대청마루에서 그 여자가 팔짱을 끼고 이쪽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이런, 눈이 마주쳤네. 사람이 늘어서 시비가 두배로 걸리는 건 내키지 않아서 슬쩍 피했다. 그와중에 이 녀석은 어떻게하면 저 돌벽같은 인간의 빈틈을 찾나 고민하는 듯 눈이 데굴데굴 굴러가고 있었다. 동시에 여자가 한쪽 눈을 찡그리더니 조용히 눈을 가리켰다. 하하, 저쪽은 도망가는 놈 쫓는게 전문인 모양이지. 

 

백아야, 네가 눈속임과 덮어두기에 능하지만 일이 터졌으면 일단 수습부터 해야된단다. 이럴때야말로 겸허하게 인정하고 뭐라도 해야지. 고치지 않으니 결국 네가 어려워하는 타입을 만났잖냐. 간만에 올라오는 유쾌함에 웃음을 흘리니 토라졌는지 방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저주라는 것은, 우리 업계적으로 표현하자면 폭력에 가까운 것이었다. 간편하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그만큼 감당해야할 리스크- 흔히 말하는 저주의 반동부터 강한 영향력을 위해 갖춰야 할 조건, 손해를 줄이기 위한 절차 등등- 도 많았다. 다만 '일단 질러버리면' 많은 것이 편해지니 욕을 먹으면서도 그에 비례하듯이 문전은 성시를 이루고 있다. 남의 기둥과 주춧돌, 바닥 아래에 주문을 새기는 것도, 새겨진 주문을 흩뜨리는 것도 말이다. 

 

아까 작업하던 곳에서 이 방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좇듯이 백아가 벽을 더듬고 있었다. 

 

"...방 전체에 경문을 깔아놔서 그물처럼 기억을 붙잡고... 붙잡힌 기억을 매개체가 오염시키는 거네요.

이러니까 잔 사람마다 약이라도 한 것 마냥 횡설수설하면서 나오지. 심플하지만 효과 좋은 저주에요.

 

 

...'그게' 맞는 것 같아요."

 

찾던 것에 가까워진 것이 어지간히 기뻤는지 백아 녀석은 어느새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매개체가 '그것'이라면 사소한 오염도 엄청 커져버리지. 그 여자가 여기서 잠까지 잤는데도 헤롱거리지 않고 정확히 '책임자'를 노리고 멱살잡은게 매우 대단한 것이었다.  어디 적응 훈련이라도 받은걸까? 아니면 그...흉한 말을 또박또박 내뱉을 정도로 민감한 걸 건드린걸까. 

 

다시 여자가 있던 곳을 보았다. 아까는 잡아먹을 것처럼 지그시 응시하더니 좀 수습하는 시늉이 먹힌 것인지 정원에서 꽃을 구경하고 있었다. 잡초가 듬성듬성 자라고 들꽃이 피어있는게 빈말로도 잘 가꿔진 것이라 할 수 없건만 뭐가 그리 좋은게 보이는걸까. 손아귀에 잡힌 것을 으스러트리고 일말의 가책도 없이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눈이었건만,

 

저 보잘 것 없는 꽃이 뭐가 좋아서 미운 인간도 버려두고 집중하는 지 조금 궁금했다.

 

"....그 여자한테 가려고요?"

 

그래. 피해자니까 어떤 상황인지 알아봐야지.

 

"난 좀 별로. 말이 전혀 통하지 않을 것 같다고요."

 

이게 바로 진실성이 중요한 이유란다. 백아야. 

어지간히 거슬렸는지 뒤로 쑥 숨어버리는 녀석을 감춰주며 정신없이 꽃 구경을 하는 여자에게 향했다. 폭력의 화신일 것 같은 기백과 별개로, 뒤에서 본 모습은 생각보다 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