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을 고른 이유 중 하나는 근처에 편의점이 있다는 점이었다. 가격과 그에 비례하는 최소한의 서비스만 생각하고 갔던지라, 이곳에는 따로 식사를 주지 않았다. 알고보니 큰 사고가 있던 매물이고, 남의 기억을 도려내가는 질나쁜 현상이 있는데 누가 24시간 상주하겠나..싶지만 암만 생각해도 속은 기분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그 남자와 드잡이질을 하는 걸 들은 건 지, 숙소 주인은 진작에 보이지 않았다. 개인 핸드폰 화면에 뜬 70% 환불이 그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였다.
"와~ 안녕하세요. 오늘은 푹 쉬셨나요?"
미닫이 문을 열어젖히니 방구석에서 쪼그려 앉아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고 이쪽을 보더니 활짝 웃었다. 멱살잡고 위협까지 한 상대에게 저러니 참 넉살도 좋다 싶었지만, 이쪽이 잘못한 것이니 그냥 받아주는 대신 용건만 말하기로 했다.
"잠을 자지 않으니 별 일 없었어요. 그나저나, 식사는 하셨어요?"
"어라,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음- 날이 흐리니까 오전 열시인지 정오인지도 모르겠네요!"
"드세요."
다음부터는 무조건 별 달린 호텔로 가겠다 마음먹으며 문제의 방에 틀어박힌 남자에게 도시락을 던져주었다. 여전히 입가를 초생달처럼 휜 채 눈을 깜빡이는 것이 이걸 왜 자기한테 주냐고 묻는 듯 보였다. 아까 너무 심하게 화풀이를 했나 싶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래도 사과는 못한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이게 무슨 뻔뻔한 심보냐 싶지만, 의심을 철회할 생각은 없었다. 거칠게 표현하면 저 뺀질뺀질한 얼굴로 은근 슬쩍 면피하려는 듯한 발언도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이유였고, 근거없는 의심과 혐오는 올바른 판단을 위해 지양되어야 하므로 정리해서 말하자면 이 사람이 내뱉는 모든 것이 온전히 모든 걸 드러낸게 아닐 거라 단정했기 때문이었다.
약 10몇년을 구르면서 보았던 불길한 감각이 느껴지는 얼굴이었고, 보통 그 감각이 드는 이들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확률이 높았다. 이 사건에서 온전히 결백할지는 몰라도, 그가 받았다는 의뢰가 마냥 좋은 방식으로 해결되진 않을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리크 비리디온은 살기 위해 유연함을 가장하고 있지만 본래 생겨먹은 것이 지독히도 완고한 인간이었고, 눈 앞의 사내는 그 잣대를 드리워 판단해야 할 대상이었다.
지뢰 밭에서 걸음걸음마다 살얼음을 밟듯이 신중해지는 것이 무엇이 나쁜가?
"편의점에서 바로 집어온거에요."
"어디보자~ 무슨 맛이에요? 아, 이거 잘 고르셨네요~ 이쪽 유부조림 도시락은 꽤 괜찮더라고요. 적당히 달큰한 소스에 같이 조려진 야채의 식감이 아주 좋던데.... 혼자 먹긴 아까운데, 조금 나눠드릴까요?"
"글쎄요, 다른 사람 한끼를 뺏어먹는 취미는 없어서."
"에이, 선생님께서 사주셨잖아요? 얻어 먹는데 맛있는 걸 혼자 먹는 것도 좀 그렇죠. 정 안되면 나눠드시는건....아, 그러고보니 선생님 성함을 여쭤보지 못했네요. 제 이름은..음- 일단 '유도화'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카멜리아에요."
"카멜리아~ 동백꽃도 좋죠. 겨울에 혼자 새파란 잎에, 눈 내릴때 새빨간 꽃을 피우는데, 제법 운치있어요."
피어나는 듯한 밝은 웃음이 마냥 원활한 교류를 위함인지, 아니면 무언가를 숨기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의심해봤자 달라질 것은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같이 사온 삼각김밥을 뜯으면서 남자가 한참 만지고 있던 것을 보는데.... 뭔가 표의문자 같은 것이 어지럽게 어떤 패턴을 그리듯이 나열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관동, 호연쪽의 말이나 방언은 어느정도 알고 있으나..간간히 보이는 익숙한 모양의 글자 외에는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그야말로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방바닥이었다.
"카멜리아씨는 이런덴 어쩌다 오시게 됐어요? 이정도로 독한 녀석이면 소문이 제대로 났을텐데요."
"가격보고 적당히 깨끗한데로 왔죠."
"와아- 보통 멀끔한데 지나치게 싸면 좀 의심하지 않아요? 성도에서는 이런걸 '사고매물'이라고 부르거든요. 게다가 여기 씐 것은 제법..독하거든요."
"...여기 뭐가 있는데요?"
악몽을 꾸게 만드는 거면 다크라이라도 있는 것일까. 지금도 플로레 지방의 어딘가에 있을 악몽 포켓몬을 생각하고 있으려니, 남자는 잠시 고민하듯이 눈을 위에서 옆으로 스르륵 굴리다 몸을 기울였다. 순식간에 얼굴이 가까워지며 낯선 향 냄새가 났다. 향기(scent)가 아니라 제사에 쓰는 향과 비슷한, 연기의 냄새였다.
"굳이 외부인에게 얘기할 일은 아니겠지만... 카멜리아씨는- 음, 아무래도 여기 휘말리셨으니 얘기해드릴게요.
그리고 입도 제법 무거우실 것 같고..."
옛날 옛날에.
오래전 이곳은 여관이 아니라 어느 부자의 집이었으며, 그 부자에게 딸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세상 모든 것을 살 수 있고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금을 지닌 부자가 딱 하나 구할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딸의 외모였다.
그녀의 외모는 금도, 보석도, 비단마저 스스로의 빛을 잃게 만들 정도로 볼품없었고, 그것을 비관한 딸은 방 안에 틀어박혀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랑하는 딸이 괴로워하는 것을 마냥 지켜볼 수 없었던 부자는 백방으로 딸의 모습을 좀 더 나아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구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이에게 원하는대로 금을 줄 것이라 알렸다.
그러던 어느날, 어떤 떠돌이 중이 부자의 앞에 나타나 말했다.
[따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아니, 해결하는 것을 넘어서 따님을 세상에서 가장 빼어난 여인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죠.]
중은 말을 마치고 부자에게 자색의 작은 조각을 건네주었다. 마치 끊어진 고리의 파편 같던 그것에선 기이하게도 복숭아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 이것을 따님의 방 아래 묻고 여섯 밤을 지나 이레째가 되면,
따님은 세상에서 가장 빼어난 미모와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닌 분이 되실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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