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음-
미안해요, 카멜리아씨. 당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봐버린 것 같아."
"..네?"
리크는 시무룩한 얼굴로 냅다 사과부터 하는 미남자를 황당한 얼굴로 보아야 했다.
이 '유도화' 라는 인간에 대하여 애초부터 얼굴이 반반한 미심쩍은 사기꾼 같은 놈. 이라고 가차없이 편견 가득한 평가를 내린적이 있었다. 원래 인간관계는 겉모습과 첫 인상으로 알 수 없는데다 때로는 알아가면서 마음 속의 경계심을 잠재우거나 대수롭지 않은 스몰토크가 벽을 낮추는 계기가 되겠지만 어느정도 시간이 흐른 뒤 '카멜리아' 는 '유도화'에 대해 경계를 한 단계 더 올리기로 했다. 현실적으로 뭔가 유물론적인 욕망이 있어 보이지 않지만 - 절도범 및 강도범부터 살인범까지- 처음보는 사이에 멱살까지 잡혀놓고도 뭐가 더 관심이 생겼는지 지나가는 훔처우마냥 알짱거리는 꼴을 보면 잘못 엮였다간 귀찮아 질 게 뻔했다. 정보전은 이쪽의 특기가 아니니, 최대한 몸을 사리는 것이 현명했다. 실제로도 카멜리아의 기억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고.
다만 이런 사소한 얘기 끝에 '사과'로 훅 찔러들어오니 이게 어떤 수법인지 알지만 황당해서라도 잠시 생각이 막혀버렸다.
"...뭘 봤는데요?"
황당하다는 눈, 시선을 돌려 허공에 두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 그리고 짧게 한숨을 한번 쉰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단단히 잠그고 있던 것이 풀렸다는 걸 인지했는지 그의 눈이 다시 이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래, 어디 한번 파헤쳐 봐라. 블러핑을 하든, 유도신문을 하든.
"거기, 칼로스식 화원이죠? 플라베베들이 종종 그런 모양의 꽃을 들고 다니는 걸 봤어요. 노란꽃이 확실히 화사한 느낌이긴 하죠. 저는 흰 꽃이 좀 더 좋지만. 아, 꽃의 취향은 당신인가요? 아니면 같이 꽃을 돌보던 분의 취향? 아무래도 열 몇살짜리 애가 온전히 화원을 돌보긴 힘드니까- 거기 앞에 계신 분이 꽃밭의 주인인거죠? 어떤 분인지는 구멍이 뚫려 있어서 보진 못했지만 카멜리아씨가 꽤 즐거워 보이는 걸 보면 나쁜 사람은 아닐- "
"잘 알았으니까 요점만 얘기해줄래요?"
"아- 그래도 너무 정 없지 않나요? 꽤 근사한 꽃밭이었어요. 제가 알던 정원이랑 완전 형식이 달랐지만 꽃 상태가 하나같이 좋던걸요? 왜 당신이 정원 구경을 하염없이 하던지 알 것 같...."
"................."
"...그 꽃밭 주인이 당신이 잃어버린 기억인거죠?"
"....네."
내적인 경계가 더 높아진 기분이었다. 마지막 한 줄을 제외하고는 전혀 영양가 없는 장광설에 식은 눈으로 보자, 은근 슬쩍 눈을 굴렸다.
"화났어요?"
"아니요. 그냥, 피차 쓸데없는 얘기로 시간을 잡아먹고 싶진 않았어요."
"하지만 일 얘기만 하면 너무 삭막하잖아요. 카멜리아씨가 좋아하는 것 같길래, 좋은 얘기를 더 하려고 했죠."
"굳이 애쓸 필요없어요."
벽이 느껴질 정도로 쌀쌀한 대답이었다. 명백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예의 그 그린듯한 미소 대신 조금 힘없이 웃어보였다. 약해보이는 것 또한 그가 지닌 가면이겠거니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팔짱을 끼고 응시하자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카멜리아씨가 절 뭐라 생각하는 지 잘 모르겠지만, 저도 나름 상도덕이 있어요.
흥정도 없이 다짜고짜 속내부터 드러내는 건 너무 무례하잖아요."
"....."
정론이다. 비록 그게 기만을 위한 한 조각이라도 얼핏 듣기에는 빈틈이 없었다. 슬금슬금 기억이니 주술이니 핑계를 대면서 그녀에 대한 기억을 알아보려는 것이 같잖아서 밀어냈더니 이런 정공법을 쓰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다시 생각해보면 그 성격 나쁜 정원사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빛나는 젊은 시절이 있긴 했으나 뭔가 객관적으로 값을 매긴다면 그리 가치 있는 정보도 아니고, 특출나게 부유한 이도 아니었고, 그녀가 죽어가면서도 깔끔하게 정리하고 치워버려서 뭔가 이름과 비석 말고는 남은 것도 없었다...거기까지 생각하니 조금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야속할 정도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가버린 이의 기억이 뭐가 귀하다고 잔뜩 날을 세웠단 말인가. 카멜리아의 모든 것이 자신에게 가치 있었지만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악착같이 숨기는 것도 우스웠다. 어쩌면 그것 또한 저 이에게 새로운 정보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카멜리아는 리크의 지독히도 여린 무언가. 라고.
"....그럼 어디 그 정원 얘기나 해보죠."
카멜리아는 자신의 약점이 아니었다. 그건 그녀가 원하는 일이 아닐 것이고, 소중한 기억에 대한 예의도 아니었다.
때로는 이것이 잘 깔린 판이나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다 생각하면서도 들어가야 할 때가 있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별 거 없는 정원 이야기가 그 순간이었다. 이 인간이 아무리 신뢰가 가지 않는 인간이라도 이건 침묵하는 순간 곧 믿지고 들어가는 일이었다.
꿈을 보는 인간에게 자신의 기억을 굳이 숨겨봤자 뭐하겠는가.
.
.
.
"본가에서도 커다란 정원이 있어요. 가주께서 화려한 꽃을 좋아하셔서 사용인들이 철마다 옮겨 심느라 고생한 기억이 나네요. 모란..금어화... "
"월급을 많이 줬으면 괜찮았을거에요. 모란...금어화... 관리가 귀찮은 녀석들인데 잘도 그런 걸 키우셨네요. 제일 화려하긴 하지만."
"화무십일홍 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모든 건 만개하면 시드는 때도 있는 법이죠. 모란이나 작약은 적당히 초라한 모습이었지만...금어화는 좀 깜짝 놀랄 모습이긴 했어요. 어떻게 그렇게 시들 수가 있지? 뭐, 어쩌면 그것도 가주님이 의도한 풍경일수도 있겠죠."
그 양반들 꽤 섬뜩한 장난치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리 내뱉는 말 끝이 제법 날카로웠다. 어딜가든 윗사람이나 웃어른은 젊은 이들과 갈등을 빚는 모양이었다. 새삼스레 이전 직장에서 사실상 자신을 방임하던 몇몇 노친네들의 면상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그 턱주가리를 날리는 상상을 하다 말을 받았다.
"유도화씨는 좋아하는 꽃이 있어요? 아니면, 정원이 있다면 심고 싶은 꽃이라든지."
"꽃 말이죠- 흐음~~~ 정원을 꾸미는 건 영 서툴러서, 사실 뭘 심어야 할 지는 감이 오지 않네요. 모란이나 금어화는 싫어요, 그 양반들 생각나서."
"뭐 당장 주문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괜찮겠다 싶은 꽃만 얘기하면 되지 않아요? 협죽도라든지."
"아하하, 무시무시해라. 그거 독이잖아요? 나뭇가지 꺾어서 젓가락이라도 선물하면 되려나요~
뭐, 그건 의도가 뻔히 보이니 통하지 않겠지만...굳이 말하자면 석산이 좋겠네요. 혹시 아세요?"
"아..그 아리아도스 다리 같이 생긴 꽃이요."
몇번 본 적이 없어 감이 잡히지 않지만 그 새빨간 아리아도스 다리처럼 생긴 꽃들은 꽤나 검정색과 잘 어울렸고, 꽤나 불길하거나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쓰인 것을 보았다. 그림이라든지, 의미심장해 보이도록 연출한 사진이라든지, 지나가듯이 본 미스테리 물이라든지. 괜히 사당이나 절간 같은 곳에 한가득히 피어서 거기에 사람을 처박아두든가 하는 식으로 유혈 연출을 대신 하기도 했었지.
"왜요, 경전이라도 쓰시려고?"
"어라, 잘 아시네요. 맞아요. 그걸로 종이 비슷한 걸 만들 수 있거든요. 아무래도 우리 같은 사람들은 글을 많이 쓰다보니까, 그런게 많이 필요하죠. 에이- 알고 계셨구나?"
"....노인네들 섬뜩하다 욕하는 건 철회하지 그래요?"
"어떻게 그런 말을!"
욕은 무슨 욕이야. 취향 똑같구먼. 부모는 자식을 닮는 것처럼 젊은 이도 노인네를 닮아가는 걸까. 살짝 신경을 건드렸는지 정말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짓는 남자를 보고 있으니, 굳이 실용적인 목적이나 짓궃은 장난이 아니더라도 제법 석산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슬 과장이 들어가는 것이 제법 가증스러운 표정 사이에 보이는 눈, 자색 눈동자 한 가운데에 찍힌 새빨간 동공이 꽤 석산의 꽃잎색과 닮아있었다. 그러고보니 머리도 까맣고, 옷도 까맣지.
"나중에 본가로 돌아가면 정원이나 한번 싹 갈아엎을까 해요."
"그거 힘들겠네요. 직원들 보너스를 두둑히 주셔야겠어요."
"그럴까봐요-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다 바꿔버리고 싶거든요. 배치도 마음에 안들고...으음- 농촌 같은 데서도 한번에 갈아 엎을 때 쓰는 농법이 있지 않던가요? 화전火田 이라고. 싹 태우고 다시 처음부터 가는게 꽤 충격적이었어요."
"......정원에 불이라도 지르게요?"
"그러면 일하는 분들도 좀 더 편하지 않을까요? 어설프게 조율하고 맞추는 것 보다는 빈 터에 처음부터 심는게 나을지도 모르죠. 저, 그렇게 까다로운 클라이언트도 아니고요. 그냥 한가지 꽃으로 싹 통일해도 나쁘지 않겠네요."
"정원에 심겨진 화초랑 나무가 자연적으로 자란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죠?"
시발!
그거 가격이 다 얼마야!
정원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당장 관성도풍 정원 한구석에 작게 자란 나무 한그루도 누군가의 이틀 생활비 급이라는 사실을 직면하게 된다.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거나 어딘가 예쁘게 수놓아진 비단같은 정원은 정성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정성(돈)과 노력(인건비)과 돈(화초)으로 이루어진, 작정하면 돈지랄의 절정이 될 수도 있었다. 이상적인 정원 뒤에는 무조건 돈이 있었다. 괜히 켈티스 타운의 마담 엘레온이 세 명의 마담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알아요. 하지만 내 걸 내가 태우잖아요?"
"........."
"아? 제가 또 말실수를 했나요?"
"존나게 재수없는 소리를 하긴 했죠."
돈 많은 것들은 지폐로 캠프파이어를 해도 된다 이거지. 은근히 속이 꼬이는 기분에 미간을 찡그리니 남자가 아하하 웃어보였다. 그림 같은 미소와 의미심장한 미소, 약간의 악의가 담긴 어두운 미소, 꾸며낸 미소 대신 드러낸 상쾌한 웃음에 잠시 굳어서 그것을 보았다.
"하지만 때론 꼴보기 싫은게 있잖아요.
눈에 띌 때마다 치우고 싶어지면, 사람을 시켜서 하나하나 뽑아내면 너무 오래걸려요.
너무 오래 자리를 지키기도 했고요."
"......."
후련해 보이는 웃음도 잠시였다. 이내 남자는 느긋하게 미소지으며 무언가를 가라앉히듯이 시선을 아래로 했다. 일순간 그 자색 눈이 아득히 어두운 색을 띄었다.
" 는 농담.
집에 불을 지르고 싶은 미친놈이 어딨겠어요? 해 본 소리에요. 그렇게 심각하게 보면 제가 부끄러워요. 카멜리아씨. 저 이래뵈도 남이 빤히 보는게 느껴지면 가슴이 뛰어서..."
" ...옆집 할머니."
"..네?"
"옆집 할머니에요. 당신이 봤던거요.
정원을 하나 가꾸고 있었는데.. 어릴때 종종 놀러갔어요."
값을 치러야했다.
본의든, 아니든, 누군가의 심연을 엿 본 이상 이것은 값을 치러야 조금이나마 연루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고, 그 늪에서 이 자를 빠져나오게 할 수 있었다. 언뜻 흘러나오던 무언가가 사라지고, 갑자기 나온 의미심장한 비밀 이야기에 그의 눈이 다시 한번 기만과 악의어린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아, 차라리 이게 낫구먼. 그리 생각하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의 상처를 정면으로 볼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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