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Xt_WELDFQGk?feature=shared

백야.
주술사 백야의 또다른 인격 역시 같은 이름을 써야하는지 여부는 실존과 자아의 문제이므로 일단 분류를 위해서 '후계자'라고 칭하기로 하자. 여하튼 '후계자'가 태어난 것은 백야가 형님을 잃고 꽤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형님이었다면, 이곳의 후계자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수백수천번을 생각하며 하나하나 연기하던 이는 어느새 제 역할에 잠식되어 스위치를 끄고 켜듯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어려운 일도 쉽게 익히고 처리하는 유능한 인재였으며, 제 위치에 맞는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부렸으며, 동시에 혼자 남은 '백아'를 아끼는 형님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단 한가지 차이라면 몸이 하나일 뿐일테고.
그것은 '백아'를 아꼈다. 단순히 보호자를 흉내내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방어기제였기 때문이었다. 보호해줄 상대가 자기자신밖에 없는 불쌍한 녀석. 누군가는 이것이 못난 자기연민이라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후계자'는 형님으로서 '백아'를 보호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뭐든 할 수 있었다. 그것이 설령 기억 한구석에 남은 추억마저 사라지는 것이라도 말이다. 설령 제 동생이 끈 떨어진 인형이 되어 영영 잠들어도 자신이 있으니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었다. 자신은 '형님'이니까.
"......."
"......."
어느새 뒤에 선 황충의 포켓몬이 날갯짓하기 시작했다. 이런 꿈에서까지 무장을 하고 들어온 그녀의 경계심에 칭찬을 보내야할까, 아니면 그 집요한 의심이 지독하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정신을 흐리게 만들어 간섭하는 영역은 강한 의지와 하찮은 날갯짓에 쉽게 깨어지는 것이라, 그가 더 손댈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손에 있는 독사슬이 없으면 이런 번거로운 여정이 말짱 헛짓이 되었다.
차라리 찾지 못했다면 좋았을텐데. 자신은 그 기억을 '나름' 소중하게 건네주었건만 돌아온 것은 배신도 이런 배신이 없었다. 계약 불이행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훼방 놓는 이 황당한 외지인 때문에 나름 고심했던 일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 생각하니 어이가 없고 분노가 치밀어 올라 웃음이 나왔다. 한숨쉬듯이 웃었지만 여자는 금방이라도 고리를 부러트릴 듯이 손에 힘을 주고 그것을 쥐고 있었다. 설령 여자를 제압하더라도 뒤에 있는 포켓몬이 그것을 부술 것이다.
"...들어가 있어요."
- .......
'저주'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립고도 끔찍한 저 얼굴이 자신을 죽이려하는 '백아'와 난입해서 참견한 '외지인'을 걱정하듯이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들어가요. 그리고 저 빌어먹을 동생 앞에 나타나지마.
당신은 남아있어야 해."
"이렇게 참견하는 거 굉장히 무례하다는 건 알고 있을까요?"
"잘 알죠. 나도 평생 해보지 않아서 좀 떨리네요."
"안하던 짓 하면 탈이 난다고 하던데요."
"나라고 하죠. 적어도 프로젝트 하나는 박살내고 가겠네."
거리를 좁히려 하는 순간 고리에 금이 쩍 갔다. 진짜 부술 작정인가 싶어 다시 뒤로 물러나자 손에 힘이 풀렸다. 아까부터 웃고 있었지만 하나하나 일이 꼬이고 같잖은 참견을 하다 못해 인질극까지 벌이는 무례함에 슬슬 속이 끓기 시작했다. 이 외지인은, 무능한 인간은 어째서 '우리'를 하나하나 부정하는 걸까. 당신이 그 긴 고통을 알고 있긴 할까. 아니, 모르겠지. 안다면, 적어도 우리를 연민한다면 얌전히 협조하는게 답이었다. 살인과 저주, 자해는 안된다는 근원적인 지루한 얘기를 하기엔 당신도 비틀린 인간이잖아.
여자가 손짓하자 기억의 형상이 사라졌다. 저 기억을 다시 찾으려면 이제 무엇을 해야할까. 그동안 자신은 ,백아는 상흔을 붙잡고 또 얼마나 견뎌야 하는걸까.
"형님이 없어도 백아는 잘 살거에요. 내가 있으니까."
"진짜 있던 기억은 삭제해버리고 오른손 왼손 사이좋게 서로 형님아우하면서 사는거요? 진짜 죽여주는 자기위로네요."
"어차피 혼자서 어떻게든 살아왔는데, 나 하나쯤은 혼자 놀아도 되잖아요. 아니면 당신이 같이 놀아주기라도 하려나?"
"유감이네요. 그렇게 어울릴 인간은 되지 못해서. 당신이 바라는 걸 주진 못할 것 같아요."
"그럼 뺏지라도 말아야지."
끓던 감정이 울컥, 튀어나왔다. 남자의 표정에는 늘 머물던 의미심장한 웃음 대신 귀화같은 불길이 번지고 있었다. 이제 조금이면, 조금이면 자신은 자유로워질텐데 왜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연민 운운하면서 막아선단 말인가. 당신은 내가 어떻게 살아왔든 내 인생에 아무것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잖아.
"내가 이 순간을 몇년이나 준비했는지 알아? 그저 편하게 살려고 하는거잖아. 누가 죽는 것도 아니야.
고작 기억 하나 없애 버리는게 당신 눈에는 그렇게 아니 꼬왔나? 어차피 좋게 보지도 않은 놈이 미치든 영영 죽어버리든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잖아. 왜 여기서! 이제와서 날 막는거야! "
처음으로 평정을 잃고 분노를 드러내던 남자의 얼굴이 무너졌다. 부서지는 얼굴로, 차마 숨기지 못한 감정을 그 틈 사이로 눈물처럼 흘리며 '백아' 는 손을 내밀어 팔을 잡았다. 강하게 움켜잡았지만 그건 제압보다는 차라리 매달리는 것에 가까웠다.
"그렇게 나를 불쌍하게 여겼다면.... 나를 도와줬어야지. 그 저주를 건네고 독사슬을 주었어야지.
당신이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지켜줬는데, 적어도 그게 나를 괴롭게 한다면 나를 배려했어야지...
나를 그렇게 연민한다면 ...그때 도와줬어야지. "
"......."
무감한 눈이 이쪽을 응시한다. 여전히 관찰하듯 뚫어져라 얼굴을 살피고 있었으나 그건 찌르는 것이 아니라 들여다보는 모습이었다. 제발 그런 눈으로 날 들여다보지마. 내가 이렇게 깨어졌잖아. 죽은 사람도 겨우 엿본 것을 당신 주제에 왜 이렇게 보는거야.
잡혀있는 손이 펼쳐졌다. 그 안에는 반짝이는 하얀 꽃잎이 있었다.
"모든 기억은 나야. 그게 좋든 싫든...
나도 좋은 기억만 있는 건 아니야. 당신처럼 치사하고 더럽게 굴 수도 있어."
여자는 서서히 손을 아래로 기울였다. 손바닥이 기울어지며 하얀 꽃잎이 남자의 손 안으로 들어왔다. 탐스럽게 아름답고 반짝이던 기억이었다.
"하지만...그 기억이 힘들다면, 당신한테 좀 줄게.
아마 카멜리아도 그정도는 이해해줄테니까."
쩍.
반대 손에서 부서진 독사슬의 파편이 후두둑 떨어졌다.
순간 세상이 까맣게 암전되었다.
P.S.
"...당신 이름, 카멜리아가 아니었군요."
"당신도 가짜 이름 댔을 거잖아."
"...맞아요. 그럼 당신 이름을 알려줄래요?"
".....어차피 만날 일 없어. 기억이나 잘 가지고 가봐."
그녀가 당신을 좋아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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