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와 재회한 것은 근 5년만의 일이었다. 근본적으로 사람보다는 저기 언덕 가득히 피어있는 꽃덤불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지만 동시에 내뱉는 말이나 생각은 더없이 건조해서 묘하게 모래알을 씹듯이 불편한 감각이 들었지만 인연이라는 것이 마냥 나 좋다고 영원하지 않고, 나 싫다고 단칼에 자르기가 힘든 것처럼 이 '선배'와 떠돌아다니는 인간의 인연은 어영부영 몇가지 우연과 몇가지 우여곡절, 약간의 실낱같은 호의, 그리고 생존신고 수준의 연락을 버무린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복잡한 관계를 설명하자면 할 때마다 달라지니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테다. 어쨌든 이 '선배'는 꽤 칼같이 단호하고 매정한 편이었는데, 그건 그때의 술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술 취해서 널부러진 꼬라지 보기 싫다고 적당히 마시거나 커피 하나씩 사서 나란히 앉아 얘기할텐데, 그날은 무슨 일에서인지 꽤 독한 술을 시켰었다. 한 잔, 두 잔, 몇가지 근황을 주고 받으며 묵묵히 마시는 걸 보니 그렇게 맨정신으로 말하기 힘든가, 싶었지만. 술이 들어갈 수록 눈빛이 살벌한 것이 절대로 알코올의 힘을 빌어 뭔가를 할 작정은 아니었나 싶었다.
"나 이사했어."
"어, 이사요? 어디로 하셨는데요? 역시 고향쪽이신가?"
"플로레지방."
"어..."
오랫동안 잊고 있던 곳이 그나마 길게 알고 지낸 이의 입에 오른 것은 대체 무슨 우연이었을까. 갑작스럽게 나온 이름에 조금 얼이 빠져 있으려니 선배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변했다.
"아는데야?"
"그..."
태연스럽게 'ㅁㅁ지방에서 왔다' 'ㅁㅁ 지방 ㅁㅁ시티에 지내고 있다' 라고 넘기곤 했지만, 그날따라 술이 꽤 들어가서 그런지 아니면 ..정말 간만에 이름을 들어서 그런지 익숙하게 둘러대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고 늘 한구석에 얹힌 듯한 감각이 온몸을 짓누르던 것으로 봐서 전자가 아니었을까.
"솔직히 너나 나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처지라 네가 어디서 뭐했는지는 딱히 묻진 않았는데...
그런 얼굴은 또 처음보니까 궁금하네. 말해봐, 차이브. 플로레지방, 알아?"
"...거긴..."
그때 자신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을까. 둔해진 머리를 애써 굴려, 장장 10년이 넘도록 담지 않던 이야기를 간신히 떠올렸다. 플로레지방에 유성산맥이 있는데...거기 이름없는 작은 마을이 있다.....그리고....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이미 '4년전' 다른 선배에게 울며 엎드려 빌면서 한번 내려놨으니, 그 진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 지루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선배'는 딱히 반응이 없었다. 그저 그 이야기를 배경음악 삼듯이, 몇번이고 끊겼다가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사실 너한테 줄 게 있어서 왔는데....아무래도 추가로 뭘 더 얹어야겠다."
"예? 줄 거요?"
"...플로레지방에서 이번에 '배틀검정'을 통해 '배틀나이츠' 라는 부서를 신설했다고 하거든."
"와, 그거 엄청 대단하네요. 이름에 배틀이 들어갈 정도면 그걸 엄청 잘해야 하잖아요."
"응."
탕.
테이블 위에 무언가가 놓였다. 굳이 이런식으로 줄 필요가 없겠지만 그건 이어지는 말을 위한 포석이었다.
"배틀검정에 참여해."
"예? 저 배틀 모르는데요?"
"일단 해. 박사님한텐 미리 얘기해놨어."
"어째서요?!"
"니가 지금 물어볼 군번이야? 까라면 까."
.
.
.
"배틀."
사실 무언가에 도전하고 부딪친다는 감각은 잘 몰랐다. 도전이야 숱하게 했고, 부딪치는 것도 굉장히 많았지만 그 기저에는 어떤 욕심보다는 당장 하루하루를 이어 나간다는 생각이 강했다. 몸 건강하겠다. 조금 험한 곳에 지내도 리스크도 적겠다. 차이브는 자신이 꽤 운이 좋게 태어났으니 험한 곳에서 그럭저럭 살아남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욕망도 딱히 없었다. 왜냐면 욕망하기엔 하루 잘 곳과 챙겨야 할 식사가 당장 급했고, 조금이나마 편해지고자 뭔갈 모아야 했으니까.
...이것이 그저 튼튼한 포켓몬과 무엇이 다르단 말일까.
펼쳐진 팜플렛을 보았다. 이곳에서는 돈에 쪼들리긴 해도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간단한 일을 도우면서도 동시에 '목표'에 집중할 수 있도록 관문을 제시하고 있었다. 주변에 훼방을 놓거나 무언가 뺏어가려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 그저 성실하게 '숙제'에 임한다는 생각은 점점 다른 것으로 변하고 있었다.
더 잘 하고 싶다.
더 높이 올라가고 싶다.
함께 다니는 녀석들이 더 강해졌으면 좋겠다.
처음 맛보는 '욕심'은 꽤나 강렬하고 노골적이라 혹시나 들킬까 저절로 주변을 둘러보게 되는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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