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틸!"
조금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모자를 쓰고, 검은 로렐라이 문양이 크게 그려진 가면을 쓴 이가 카페로 들어서자 쇠오리는 청록색의 잔상을 남기듯이 그 품에 파고 들었다. 통상적인 몸이 아니라 출렁, 하고 몸이 흔들리는 감각이 있었으나 이내 가느다란 손가락이 머리카락를 마구 볶듯이 짓궃게 쓰다듬은 뒤 냉큼 옆구리에 끼웠다. 꺄아아- 하는 비명소리 같은 소녀의 웃음과 큭큭 거리는 여인의 웃음이 어지럽게 뒤섞이며 이 기묘한 한쌍은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여기 술은 있니?"
"카페라서 술은 안돼요~ 사과 파이 엄청 맛있어!"
"그런가? 그럼 이거랑 묽게 만든 블랙커피로."
2년하고도 2달. 짧다면 짧다 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이 돈독한 부녀가 그 사이에 편지 몇장 빼고는 직접 만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한다면 꽤 긴 시간만의 재회라 할 수 있었다. 다만 운이 좋은건지 아닌건지 둘 다 무언가를 그리워 하는 대신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생각하며 알아서 잘 사는 타입이라, 어색함도 거리감도 없이 태평하게 장난치며 인사할 수 있었다.
"갑자기 얘가 진지한 편지를 보낸다 했더니, 대재앙은 또 뭐니? 단델리온 길드에서 단체로 오염 퇴치 의뢰라도 받은거야?"
"어어...원래는 처음 얘기한 것 처럼 신부 마중이긴 했는데..."
두 달동안 단순한 용병길드에서 세상을 구한 영웅으로 거듭난 이야기는 꽤나 장대했으나, 정작 얼떨결에 대재앙을 막고 영웅이 되어버린 이가 그걸 능숙하게 풀어낼 재주는 없었다. 이러니 모든 영웅담과 가십을 노래하는 음유시인들이 먹고 사는 것일테지. 허나 이 여름바람이 산만한게 하루 이틀은 아니었는데다 이 보호자쪽도 충분히 그런 종잡을 수 없는 면을 이해하고 있어 필요한 서사는 문제없이 전해졌었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 환상으로 여겨지던 유리성에 다다랐을땐 그러려니 듣던 그녀도 조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닿기만 한다면 앉은뱅이도 걷게하고 눈 먼 자도 눈 뜨게 하는 기적을 선사하는 곳. 그러나 그 누구도 찾지 못한 곳. 그렇기에 그저 편리하고 허무한 공상이라 생각되던 이야기가 실존했다. - 이래서 세상 살 맛이 난다니까.- 그리고 그 기적 앞에서 그녀는 그리 평가할 뿐이었다. 가끔 예상하지 못하고 마주한 아름다움에 마음을 뺏겨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또한 인생사가 아니었던가. 자신이 사랑하는 어린 바람은 충분히 그런 것을 마주할 자격이 되었다.
"아빠."
"..왜 그러니, 틸?"
"아빠한테 묻고 싶은게 있어요."
"......."
보통이면 뭘? 이라고 하겠지만, 이 둘은 가족이었고, 오래전 자신에게 구해진 어린 바람이 맹세하려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살 날이 구만리 같던 어린 바람이 구명에 얽매이길 원치 않았던 마리드는 단호하게 그걸 막았다.
가면으로 가려져 표정을 알 수 없었지만 어린 바람은, 자신의 아버지가 웃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단 한번도 자신의 선택에 후회한 적이 없었으니까. 선택의 결과로 실패만 하다 영영 옛 모습을 잃고 어쩌다 자식까지 딸리게 된 것도 웃으면서 적응하는 사람이었으며......
호의마저 제 선택을 모욕한다 여길 수 있는 고집불통에 삐딱한 요정이었다. 그러니 기적의 성을 말하고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에 따라 이 관계가 크게 어그러질 수도 있었다. ...만약 그녀의 의사와 관계없이 기적을 바랐다면. 말이다.
"유리성에 있는 마법사 시그드리파가 몸을 잃은 사람들을 고쳐줄 수 있대요.
사실 언제 돌아갈 지 여부를 아빠한테 전적으로 맡기고 싶었지만, 시그드리파는 사정이 있어 움직일 수 없고 유리성은 닫혀버릴거에요."
처음 생각한 소원은 그것이었다.
- 미잔느님, 제 가족에게 단 한번 선택할 기회를 주세요.
기꺼이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질 것인가, 아니면 우연히 잡은 행운을 붙잡을 것인가. 그 선택권을 선물처럼 가족에게 주고 싶었다. 허나 복원의 기적은 오로지 새로 태어난 거울의 소서리스에게만 허용된 축복이었으며.... 그마저도 그녀의 전적인 호의에 기대어 다시 찾아가 매달려야 했다. - 시그드리파, 우리 아빠에게 단 한번, 원래대로 돌아올 지 선택할 기회를 줘.- 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어떤 행운은 직접 달려가 그것을 선택하여 움켜쥐어야 하는 법이었다.
나무 밑에서 입을 벌리고 서 있는 이는 유구하게도 게으르고 무례하게 취급받은 것처럼.
허용되는 시간동안 최선을 다해 기적을 나눠주려는 마법사와, 기적이 닿지 못해 좌절한 사람들을 위해 대신 화를 내 준 등대지기의 마음에 답을 해야했다.
"옛날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행동에 따라 복을 받았어요."
부와, 명예, 그리고 오랫동안 보장 될 해피엔딩. 모든 주인공들은 올바른 선택을 하여 누군가를 도왔고 마땅히 얻을 찬란한 것들을 두 팔이 차고 넘치게 받아 영원불멸 행복하게 살았다. 다만, 현실은 동화가 아니었기에 주인공의 선택이 옳다는 장담을 할 수 없었고, 그 선택이 오히려 최악의 결말을 낳을 수도 있었으며, 비참하게 굴러도 받는 것이 오명과 파멸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보호자는 불확실하고 얼룩진 세계속에서 선택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었다.
"아빠는...아빠들은 세상이 이야기처럼 아름답지 않다고 말해줬지만..."
겨울바람은 닥쳐오는 시련의 모습과 감각을 알려주었고, 물거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서 의연하게 얽매이지 않고 나아가는 법을 알려주었다. 삶이 가혹하나 왜 우리는 끝없이 행운과 마땅한 상벌과 기적, 최종적으로는 희망을 노래하고 기대하게 되는가. 왜 온갖 불행과 고통과 절망과 저주가 빠져나간 상자 아래에 말라붙듯이 남은 행운을 바라보는가.
"저는 우연히라도 생긴 행운을 아빠에게 선물하고 싶어요.
아빠에겐 그럴 자격이 있잖아요."
시련과 역경이라는 것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주하는 순간 숨막히는 것이었다. 혹시나 이 말이 아빠의 선택을 침범하는 것이면 어쩌지? 가슴 한구석에 올라오는 두려움이 얼룩처럼 번졌으나, 그걸 견디듯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괜찮아, 난 선택했어. 그러니까 괜찮아.. 닥쳐올 선택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침묵하던 검은 로렐라이 가면의 마리드가 작게 웃었다.
"어이구, 턱이 호두된거봐라. 그러다 울겠다?"
"......"
"왜 갑자기 여기 네메시스까지 와라고 전보 술식까지 쳐가면서 닦달했나 싶더니.. 그럴려고 그런거였어?"
틸, 고개 들어봐. 얼굴 좀 보자.
웃음기 섞인 말과 함께 뺨을 가볍게 주무르는 손길이 익숙했다.
"이렇게까지 닮게 키울 생각은 없었는데....어쩌다가 내 생각을 너무 잘 알아버린걸까...
.....그래, 틸. 네 말대로 얘기도 하지 않고 멋대로 고쳐버렸으면 꽤 낙담했을거야. 그래도 네가 좋으니까, 감내했겠지."
이 또한 자신이 구하고 사랑했던 가족의 선택이니 참았을 것이다. 그녀의 선택이란 그런 것이었다.
"...물어봐줘서 고마워."
기꺼이 구할 것을 선택하고 영영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을때 절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 것이라 생각했으나, 자신의 선택으로 꼴보기 싫은 몬스터가 죽었고, 어린 목숨이 살 수 있었고 치유되어 자유로운 바람이 되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자신의 선택은 고향을 영원히 등지게 했으며, 계속해서 분쟁과 마찰과 실패를 빚어냈고, 끝내는 몸까지 앗아가버렸으나 그 선택은 자신이 자유롭게 한 것이니, 기꺼이 받아들였다.
"나는 내 자유로 한 선택에 기꺼이 책임을 졌지만,
그 사실에 집착해서 선물을 거절한 바보는 아니야."
다시 돌아간다면 마냥 행복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모습을 되찾은 옛 네레이드를, 바다를 버린 자를 누군가는 알아볼테고 새로운 문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잠잠하던 아집과 비틀린 성질머리가 그럼 우리가 한 건 뭐냐고 불쑥 튀어나올때도 있을테다.
"틸, 아빠가 왕년에 뭍에서 듀엣 제의 여럿 받았다고 했지? 나중에 보여주마. 내가 고향에서는 별로 였는데, 뭍에서는 엄~청 먹혔거든."
하지만 못된 요정은 당당했으나 비장한 인류는 아니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반드시 행복해진다. 영웅이 되어버린 어린 바람이 소중히 품어 내어 주는 기적을, 기꺼이 잡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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