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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의 시그드리파] 서브퀘스트 ▶ 그렇다면 내게, 너의 이야기를 들려줘 유리성 내부에는 갖가지 엘릭시르가 심어진 정원이 자리했다. 이곳에서 잠들고, 뛰노는 시그드리파의 말에 의하면 '메리의 정원'이라고 하는데, 세포 하나하나를 베는 듯한 칼바람이 불어오는 성 밖이나 한겨울의 벽난로 앞처럼 온화하고 묵직한 따스함을 지닌 성 내부와는 또다르게 아늑했다...그리고 정원에 융단처럼 얕게 깔린 잔디 위에서 녹색의 윈드워커와 또 하나의 하얀 드래곤은 나란히 단델리온의 시그니쳐 자세 - 물론 길드원들의 승인은 받지 않았다-로 방탕하게 누워있었다. "이 자세, 무슨 의미가 있는거야?" 그저 어딘가 평화로운 언덕에서 님과 함께 이사가서 살고 싶은 사람마냥 두 팔로 머리를 받치고 벌러덩 드러누워있으면 편할텐데, 이 고릴라 인형 자세는 상반신은 바닥에 챡 붙어 방탕하게 누웠으나 두 다리를 접어.. 2025. 12. 4.
[보팔] 서브퀘스트 ▶ 그 불길한 붉은 눈의 검은 토끼 "좋아."- ..... 원정이 시작될때쯤 페이베리에게 '무기'에 대하여 간단한 상담 겸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거대한 도끼를 나무 막대기마냥 휘두르며 '파괴'하는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는 길드 넘버원과 달리, 이 2년짜리 용병은 무기를 다룰 줄은 알았으나 손에 익은 무기를 가지고 어떠한 경지에 오르는 것은 아직 한참 멀었던 터였다. 그때 페이베리의 말로는 '어떤 무기를 쓰냐' 에 따라 단련해야 할 포인트가 다르다고 했었다. 그 뒤로 몇번 그가 단련할 때 찾아가 시범을 보거나 무기를 쥐어봤는데, 가볍게 도끼를 휘두르고, 활을 당기고, 휴대하던 단검을 하나 꺼내 휘두르는 것을 보면서 몸을 쓰는 부위와 자세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몇번 더 움직인 끝에 깨달은 것은 일단 단검술이 꽤 잘 맞고.. 2025. 12. 1.
[7] 보내지 않을 어떤 편지 아빠 안녕! 잘 지내고 있어요? 술은 적당히 드시는거죠? 저 사장님한테 부탁했으니까 나중에 물어볼거에요. 진짜라고요. 저번에 우리 길드에서 큰 일을 한다고 했잖아요? 어디까지 얘기해야 '프로 길드원'이라 해야할지 몰라서 적당히 백작님의 신부를 맞으러 간다 했었죠. 그때는 이래저래 주변에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어서 그게 더 걱정이 되었지만.... 음- 원정은 어떻게 되었냐면요. 된통 꼬여버렸어요. 평생 보기 힘든 대륙의 마법사님들을 보고, 블룸라이즈를 위협한 혈룡도 물러나게 하고, 레인바인 계곡에서 오염이 범람해버려서 우화한 이무기도 제압하느라 정작 다른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걸 본 데다 기사님들과 영영 헤어져야 했지 뭐에요? 얼핏 들으면 이게 일하러 간 건지, 아니면 대륙의 골칫거리를 해결한 영웅담인지.. 2025. 12. 1.
[改] 옛날 옛적 바닷속에 어떤 요정이 살고 있었다. https://wintertree90.tistory.com/493 / https://wintertree90.tistory.com/503 에서 이어집니다. 에리얼은 여러모로 첫번째 보호자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겨울바람에서 태어나 사람과 교류를 하지 않고 이렇다할 감정표현도 없던 아빠와는 달리 술을 꽤 좋아했고 유쾌했으며, 가끔 좀 걸걸한 단어를 쓸 때가 있으나 말하는 것을 즐기는 이 였다. 막 변해버린 제 몸이 불편하다 투덜대면서도 끊임없이 말하고 내키는대로 행동하는 걸 보면서 어린 짐승같던 윈드워커도 종종 저 사람이 위태롭다 생각할 정도면 고집도 대단했다. 그 괴상한 고집과 위태로운 삶에도 나름 장점이 있냐 하면, 하루 아침에 제 육신을 잃어버린 뒤에도 자신의 보호자는 이 몸 참 뭣같다고 욕을 하면.. 2025. 11. 29.
리틀프린스 무언가의 운명이었을까, 아니면 예정된 한쌍의 짝이었던걸까. 고대 문명에서 다루던 이륜차의 레플리카, 쇳덩이는 어느 플로리안의 파트너와 같은 이름이었다. 제법 흥미롭게도 그레인의 둘도 없는 파트너가 닮은 것은 이름뿐만이 아니라 옛 문명의 흔적이 남은 쇳덩이라는 성질도 있었다. - 너, 그레인씨의 리틀프린스를 아니?- 잘 닦인 작은 전차에게 몸을 기울이며 물어보지만 이것은 온전한 신비를 가진 원형이 아니라 마법사의 기적이 닿은 복제품이니 그때 어느 비행사가 만난 아이같은 존재가 듣고 있을 확률은 거의 없을테다. "잠깐만 타 봐도 돼?""되긴 합니다요! 그래도 이륜차가 익숙하지 않으면 갑자기 출발해서 놀라실 수도 있답니다!""응, 타기만 할게." 난 지 20년, 바람을 타고 길을 따라 날아오르는 것은 익숙하나.. 2025. 11. 28.
흔적(은 화살 > 시올) "신관님, 이거." 말간 유리같은 눈이 이쪽을 향하자 가지고 있던 단검을 건넸다. 한줌 바람으로 화한 이가 있던 자리에서 유일하게 남아 그가 이곳에 있었다는 듯 피를 머금은 물건이기도 했다.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 그 가족의 숨통을 끊은 검을 준다는 게 어떤 바람을 불러올 지는 몰랐다. 누군가는 이걸 모욕으로 해석할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이게 극단적인 선택을 부를지도 모른다 생각하겠지. 상실을 겪은 사람은 한번 크게 부숴진지라 겨우 일어났을때 어떤 방식으로 짜맞춰질지 알 수 없으니 이성적으로라면 타당한 이유였다. 시올은 제 형제가 저를 감싸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을 눈 앞에서 보았고, 영영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도 보았다. 그 마음이 어떤식으로 금이 가고 상흔이 어떻게 남을지는 오로지 그 자신만이 알고.. 2025. 1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