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509 [8] 프리즘호에 다시 한번 무도회가 열렸다. 화려한 선상에서 참가자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아니, 실상 참가자들의 육신만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춤과 연회를 반복하며 난장판을 일으키는 모양이었다. 바깥 상황은 알 수 없으나 노이즈가 잔뜩 낀 화면 사이로 얼추 읽어낼 수 있는 정보와 프로메테우스-아담-쪽에서 보내는 단편적인 정보로 보아 이 난장판이 단순히 갇혀버린 바다위의 유람선 뿐만 아니라 얼룩처럼 번져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4년 전 빛과 불길이 이곳을 휩쓸었듯이 기분나쁜 음악과 광기. 이런 단어는 추상적이라 썩 내키지 않았으나 광기라는 말이 잘 어울릴정도로 불쾌한 악의와 세뇌가 번지고 있었다. 애써 눈을 붙이고 잠이 들었으나 지난밤 연회장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뒤집혔을때 느껴지던 불쾌한 감각과 함께 깨.. 2025. 4. 29. [진화] 어떤 짧은 꿈 [주의] 가정폭력/청소년 학대 요소가 있습니다. 차이브는 제 인생이 생각보다 공정하다 생각한다. 물론 천칭의 상징인 공정함을 생각한다면 계속 마주하는 숱한 부조리가 어찌 공정한 것이냐 묻는 이들도 있을테다. 다만 시간이라는 건 파편이 아니라 이어지는 물줄기에 가까운 모양인만큼 길게 본다면 결국 그 눈금은 평행을 그리기도 한다. 전혀 예상치 못한 관점에서, 그리고 원치않은 방식으로. 이를테면, 가족이라는 것이 그러했다. 누군가는 가족에게서 애정을, 신뢰를, 돌아갈 곳을 떠올리지만 그에게 있어서 가족은 '가장 가까운 것' 이자 '가장 상처입히기 쉬운 것'이었다. 흔히 불화가 있거나 아니면 일방적으로 최악의 형태인 가족을 가진 이들은 누구나 그리 생각하겠지만, 이 천칭이라는 것이 기.. 2025. 4. 25. [메모리체육관] 메테오시티가 도전자의 퇴로를 막는 관문이었다면 메모리 체육관의 수수께끼 회랑은 그 등을 미는 관문이라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과거의 환상. 거기다가 약간의 질 나쁜 초현실적인 무언가가 개입한 오염된 영화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과거 깊이 불탄 상흔이 곪아버린 자국이었으며 동시에 너희가 관문을 넘는다면 마주할 무수한 시간 중 이런 것이 있을 것이란 암시였다. 인력을 모으기 위한 시험치고는 조금 독하고, 발들이는 이의 멱살을 잡는 듯한 거친 관문이었지만 그 환상의 끝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말하는 것이 지금의 플로레 지방을 만들었으리라. 그것은 오랫동안 고향을 떠난 이도, 이곳을 전혀 모르던 외지인도 모르던 어떤 의지라 할 수 있었다. "일을 벌인 것은 [극단 나비춤]. 그리고 제일 중심이 되는 범인은 극단장.. 2025. 4. 24. [Shall We Dance?] 하프의 선율이 흡사 바람처럼 가느다랗게 홀을 돌고 있었다. 이틀째 오후 9시. 다시 한번 세레니티 홀에 있는 조명에 불이 들어오며 하얀 대리석으로 된 천장과 바닥, 기둥이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중 홀의 한가운데 매달린 샹들리에의 빛이 별빛마냥 부서지듯 흐르고 있었다. 빛의 수면을 노닐듯이 잘 차려 입은 사람들이 제 파트너에게, 아니면 새로운 파트너를 바라보며 일제히 움직이는 그 사이에서 이쪽을 보는 마담 바실이 보였다. 몸을 조이는 정장을 입는 것은 거의 오랜만인지라 어색하게 손목을 가볍게 돌려보며 마른침을 삼키는 것도 잠시, 홀에 선 파트너를 바라보자 수없이 연습했던 동작이 생각났다. 허세라면 허세라 할 수 있는 부족한 격식을 차린 제안을 받아 준 파트너, 몇번이고 실수하며 움츠러들던 학생에게.. 2025. 4. 21. [7] 무도회 준비 "자, 그럼 시작해볼까요?" 호기롭게 바실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은 좋았으나, 처음 교습을 시작할 때는 다소 어색했다. 단순히 서투름의 문제가 아니라 둘의 신장 및 덩치 차이가 꽤 컸기 때문이었다. 제법 아담한 체구를 지닌 바실에 비해 이쪽은 정말 지나가면서 봐도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편인지라 저도 모르게 엉거주춤하게 허리를 숙여야 했다. "긴장 풀어요. 리드를 해야하는데 그렇게 숙이고 있으면 이끌 수도 없겠죠?""하지만...허리를 펴면 아주머니께서 힘들지 않으실까요?""괜찮아요. 우리가 제일 처음 해야 할 건 스텝을 맞춰야 하는거에요. 발이 안정적이어야 다음 동작으로 연결할 수 있답니다. 말하자면 나무 뿌리와 나뭇가지 같은 관계지요." 바실이 힘을 빼기 위해 주지 시킨 것은 하나였다. 동작을 완벽.. 2025. 4. 21. [아르바이트] 벚꽃 보러 피크닉 갑시다! 메테오 시티의 그림자를 담당하던 어둠길이 싹 얼어붙고 밀려버린지 약 1년, 꽤나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생각했겠지만 그곳이 철거되고 새로이 자연공원이 지어지자 거짓말같이 분위기가 바뀌었다. 어둠길에 쌓여있는 많은 이권과 그곳의 주민들의 상황, 기타 복잡한 문제를 일단 제외해보자. 때는 4월 하순으로 향하는 한 봄. 벚꽃이 만개하는 시기였다. 공원 가득히 심긴 벚나무의 벚꽃이 일제히 피어나 살랑살랑 바람이 불 때마다 하얀 눈같은 꽃잎을 날리고 있었다. 얼핏 보면 그 모습이 흡사 눈발같았으나 그러기엔 햇살이 너무나 따뜻하고 마치 어루만지는 듯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이 봄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차이브님!""데이씨!" 이 짧은 계절, 꽃 속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는 몇 없었다. 자고로.. 2025. 4. 20. 이전 1 ··· 7 8 9 10 11 12 13 ··· 85 다음